28. 왕사(王師)로 봉숭(封崇)되는 날 설법하다

신해년 8월 26일

   스님께서 법좌에 올라 불자를 들고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이 산승의 깊고 깊은 뜻을 아는가. 그저 이대로 흩어져버린다 해도 그것은 많은 일을 만드는 것인데, 거기다가 이 산승이 입을 열어 이러쿵저러쿵 지껄이기를 기다린다면 흰 구름이 만 리에 뻗치는 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말로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고 글로는 기연에 투합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뜻을 잃고 글귀에 얽매이는 이는 어둡다. 또한 마음으로 헤아리면 곧 어긋나고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나며, 헤아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면 물에 잠긴 돌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조사 문하에서는 길에서 갑자기 만나면 그대들이 몸을 돌릴 곳이 없고 영(令)을 받들어 행하면 그대들이 입을 열 곳이 없으며, 한 걸음 떼려면 은산철벽(銀山鐵璧)이요, 눈으로 바라보면 전광석화(電光石火)인 것이다. 3세의 부처님도 나와서는 그저 벼랑만 바라보고 물러섰고, 역대의 조사님네도 나왔다가는 그저 항복하고 몸을 감추었다.
   만일 쇠로 된 사람이라면 무심코 몸을 날려 허공을 스쳐 바로 남산의 자라코 독사를 만나고, 동해의 잉어와 섬주(曳州)의 무쇠소 (鐵牛)를 삼킬 것이며 가주(圈州)의 대상(大像)을 넘어뜨릴 것이니, 3계도 그를 얽맬 수 없고 천 분 성인도 그를 가두어둘 수 없다. 지금까지의 천차만별이 당장 그대로 칠통팔달이 되어, 하나하나가 다 완전하고 낱낱이 다 밝고 묘해질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임금님의 은혜와 부처님의 은혜를 한꺼번에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주장자를 들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 주장자 밑의 잔소리(註脚)를 들으라" 하고 내던지셨다.


29. 갑인 납월 16일 경효대왕(敬孝大王) 수륙법회에서 영가에게 소참법문을 하다

   스님께서 법좌에 올라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죽비를 들고 탁자를 한 번 내리치고는 말씀하셨다.
   "승하하신 대왕 각경선가는 아십니까. 모르겠으면 내 말을 들으십시오. 이 별(星兒)은 무량겁의 전부터 지금까지 밝고 신령하고 고요하고 맑으며, 분명하고 우뚝하며 넓고 빛나서 온갖 법문과 온갖 지혜와 온갖 방편과 온갖 훌륭함과 온갖 행원(行願)과 온갖 장엄이 다 이 한 점(點)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한 점은 6범에 있다 해서 줄지도 않고 4성에 있다 해서 늘지도 않으며, 4대가  이루어질 때에도 늘지 않고 4대가 무너질 때에도 줄지 않는 것으로서 지금 이 회암사에서 분명히 제 말을 듣고 있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이 법을 듣는 그것은 범부인가 성인인가, 미혹한 것인가 깨달은 것인가.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인가, 결국 어디 있는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탁자를 한 번 내리치고는, "그 자리(當處) 를 떠나지 않고 항상 맑고 고요하나 그대가 찾는다면 보지 못할 것이오" 하고 죽비를 내던지고는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육도중생에게 설법하다

   스님께서 자리를 펴고 앉아 죽비를 가로 잡고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만일 누구나 부처의 경계를 알려 하거든, 부디 마음(意)을 허공처럼 깨끗이 해야 한다. 망상과 모든 세계를 멀리 떠나고, 어디로 가나 그 마음 걸림이 없게 해야 한다. 승하하신 대왕 각경선가를 비롯하여 6도에 있는 여러 불자들은 과연 마음을 허공처럼 깨끗이 하였는가. 그렇지 못하거든 다시 이 잔소리를 들으라.
   이 정각(正覺)의 성품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위로는 모든 부처에서 밑으로는 여섯 범부에 이르기까지 낱낱에 당당하고 낱낱에 완전하며, 티끌마다 통하고 물건마다 나타나 닦아 이룰 필요없이 똑똑하고 분명하다. 지옥에 있는 이나 아귀에 있는 이나 축생에 있는 이나 아수라에 있는 이나 인간에 있는 이나, 천상에 있는 이나, 다 지금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모두 이 자리에 있다. 각경 선가와 여러 불자들이여!"
   죽비를 들고는 "이것을 보는가" 하고는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이 소리를 듣는가. 분명히 보고 똑똑히 듣는다면 말해 보라. 결국 그것은 무엇인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부처님 얼굴은 보름달 같고, 해 천 개가 빛을 놓는 것 같다."
   죽비로 향대를 한 번 내리치고는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30. 병진 4월 8일 결제에 상당하여

   스님께서 향을 사뤄 황제를 위해 축원한 뒤에 법좌에 올라 불자를 세우고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집안의 이 물건은 신기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되, 해같이 밝고 옻같이 검다. 항상 여러분이 활동하는 가운데 있으나 활동하는 가운데서는 붙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산승이 오늘 무심코 그것을 붙잡아 여러분 앞에 꺼내 보이니, 여러분은 이것을 아는가? 안다 해도 둔근기인데 여기다 의심까지 한다면 나귀해(驢年)에 꿈에서나 볼 것이다. 그러므로 선(禪)을 전하고 교(敎)를 전하는 것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요, 경론을 말해 주는 것도 눈 안에 금가루를 넣는 것이다.
   산승은 오늘 말할 선도 없고 전할 교도 없소. 다만 3세의 부처님네도 말하지 못하고 역대의 조사도 전하지 못했으며, 천하의 큰스님들도 뚫지 못한 것을 오늘 한꺼번에 집어 보이는 것이다."
   주장자를 가로잡고 말씀하셨다.
   "알겠는가. 당장에 마음을 비울 뿐만 아니라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는 주장자를 던지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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