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기독교의 모습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수행공동체적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서 안토니(Antony, c. 251~356)라는 수도승을 꼽는데, 도올 선생의 도마복음 연재기사에서 이 분의 편지글을 인용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님 안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아는 자는 자신의 시간을 깨닫는다. 자신의 시간을 깨달으면 부질없는 인간의 언설에 동요됨이 없다."
초기기독교의 수도승의 대표적인 인물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요즈음의 기독교에서 설교되는 말과는 많은 차이가 남을 느낀다. 오히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와 같다. 니체도 "관찰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한 관찰하는 법을 아는 소수의 사람 중에 자기 자신을 관찰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라고 물으며, 수 많은 성인들이 한 목소리로 자신을 볼 것을 말했다. 이 짧은 편지글의 마지막 문장을 보고 나서 나는 성철스님의 열반송이 생각났다.
生平欺狂男女群 생평기광남녀군
彌天罪業過須彌 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 활함아비한만단
一輪吐紅掛碧山 일륜토홍괘벽산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스님이 조계종 종정에 취임 후 MBC와의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전국의 불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 말씀‥‥내 말에 속지마라!
내 말 말이야. 내 말에 속지마라, 그 말이야!"
'시끄럽다'고 말해도 이는 다시 한줌 소음을 더할 뿐이니, '시끄럽다'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할 일이다. 염화미소에 대해 혜심선사가 "부처가 꽃을 들고 가섭이 미소짓는" 일을 두고 "이는 철면피가 수치를 모르는 짓이라"고 독설을 퍼붓는 것처럼 선가의 대화방식은 생각의 길과 말의 길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라면 서슬퍼런 칼날처럼 날카로운 말도 주저없이 내뱉곤 한다. 선사들은 대중들을 위해 하는 법문도 구업(口業 - 입으로 짓는 업)을 짓는 일이라고 말하시곤 한다.
성철 스님은 열반송을 짓고 다음날 새벽 크게 숨을 들이켜
"참선 잘 하그래이"
한 마디를 하시고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