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조(三祖)께서 말씀하시기를, '시비득실(是非得失)을 동시에 놓아 버리라'하셨다.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법에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유연(有緣)에 머물지 않는다 하고, 머물지 않는 거기에도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공인(空忍: 忍은 바른 앎, 지혜라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그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를 깨달았다고 고집하는 자를 내견(內見)이라 하며, 인연과 닦아 얻음을 통해 이룬다고 집착하는 자를 외견(外見)이라 한다.

   지공(誌公)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견과 외견 모두가 착각이다'라고 하셨다. 눈·귀·코·혀가 각각 유·무 모든 법에 집착하여 물들지 않으면 이를 4구게(四句偈)를 수지(受持)한다고 하며, 사과(四果)라고도 한다.

   6입(六入)에 자취가 없는 것을 육신통(六通)이라 한다. 유·무 모든 법에 막히지 않고, 막히지 않음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면 이를 신통(神通)이라 한다. 나아가 이 신통을 지키지 않으면 신통이 없다고 한다. '신통이 없는 보살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가장 불가사의한 향상 부처님(佛向上人)이시다. 또한 자기천(自己天)이며, 지혜로 관조함이다. 찬탄은 기쁨이며 기쁨은 경계에 속한다. 이렇게 기뻐할 경계는 하늘이며 찬탄하는 것은 사람이어서 사람과 하늘이 만나니 이것을 '청정한 지혜(淨智)는 하늘, 바른 지혜(正智)는 사람'이라 하기도 한다.

   본래 부처가 아닌데 부처라 하면 그것은 체결(體結)이며,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는 것마저도 없으면 이를 매임을 없앴다(滅結), 또는 진여(眞如), 체여(體如)라 한다.

   부처를 구하고 보리를 구하는 것을 현신의(現身意)라 하니, 조금이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모조리 현신의라 한다. 그러므로 '보리를 구함이 훌륭한 구함이긴 하나 티끌(塵累)을 더할 뿐이다'하였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 대중이며, 유·무 등 모든 법을 구하면 중생 대중인데 이제 비추어 깨달음으로 유·무 등 모든 법에 머물지 않으면 대중의 테두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소리·냄새·맛·촉감·법 등을 낱낱이 좋아하지 않고, 그 모든 경계를 탐착하지 않아서 십구(十句)의 탁한 마음이 없기만 하면 요인성불(了因成佛; 이치를 바로 비추어 부처가 되는 것을 요인 성불이라 하는 것에 비해 여러 가지 수행하는 연을 빌어 부처가 되는 것을 因緣成佛이라 한다) 이며, 글(文句)을 배워 깨닫고자 하는 자는 인연성불(因緣成佛)이라 한다.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을 알면 부처님을 설명할 수 있지만 안다 본다 하면 되려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부처가 알고 부처가 보고 부처가 설명한다 해야 맞을 것이다. 이것은 불(火)을 본다 하면 옳겠지만 불이 본다 할 수는 없고, 칼로 물건을 벤다 하면 옳겠지만 물건이 칼을 벤다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부처를 안다는 사람, 부처를 보았다는 사람, 부처를 설명하는 사람은 항하수 모래알 같으나, 부처의 앎, 부처의 봄, 부처의 들음, 부처의 말씀은 만에 하나도 없다. 이들은 자신에게 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지하여 눈을 삼을 뿐이다. 경전에서는 이를 추론(比量智)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부처의 지해(知解)를 탐하는 것도 역시 비량지이다.

   세간법으로 드는 비유를 유사비유(順喩)라 하는데 방편교설이 그것이다. 궁극적인 교설(了義敎)은 반대비유(逆喩)인데 머리·눈·골수·뇌를 버린다 한 것이 그것이다. 지금 부처·보리 등의 법을 사랑하지 않는다 함은 반대비유로서 버리기 어려움을 머리·눈·골수·뇌에 비유하였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법을 관조함을 머리라 하고, 있다 없다 하는 경계법의 모양에 꺾이게 됨을 손이라 하며, 목전에 경계를 전혀 관조하지 않을 때를 골수·뇌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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