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스님께 물었다.
   "보십니까?"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본다."

   다시 물었다.
   "본 뒤에 어떻습니까?"

   그러자 스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보는 것이 둘이 아니다. 이제 보는 것이 둘이 아니라면 보는 것으로 볼 것을 보지 않는다. 만일 보는 것을 다시 본다면 앞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냐, 뒤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겠느냐. 마치 '볼 것을 볼 때엔 보는 것이 아니며, 보는 것은 오히려 보는 것을 떠나 보는 것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법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실행되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께서 빨리 기약을 주신다(授記)고 하였다."

   그러자 이렇게 따져 물었다.
   "보는 것이 이미 보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기약을 주신다는 말이 어떻게 기약을 주신다는 말이 되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종지(宗)부터 깨달은 사람은 빨아놓은 옷처럼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상(法相)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습 떠난 것을 '부처'라 하는 것이다. 허와 실을 둘 다 간직하지 않고 중도(中道)만이 오롯하고 묘하다. 한 가닥 같은 이 길을 통달하여 후진들이 그 단계에 계합하므로 '기약을 준다'고 할 뿐이다.

   무명(無明)은 아버지이고 탐애(貪愛)는 어머니이며, 자기는 병이고 다시 자기를 치료함은 약이다. 자기라는 칼로 다시 자기 무명과 탐애라는 부모를 죽이므로 '부모를 살해한다'고 했던 것이다. 한 마디 말로 일체법을 견주어 타파하니, 때아닌 때에 밥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법은 때아닌 밥이며, 나쁜 음식이며 보배 그릇에 담긴 더러운 음식이다. 또한 파계이며, 망령된 말이며, 잡스러운 음식이다.

   부처님은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탐하여 소유하거나 조작하면 모두가 위배되는 것으로 도리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탐하고 물들면 그것을 모조리 '수수(授手)'라고 이름한다.

   탐내거나 물들지 않고, 탐내거나 물들지 않음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조차도 없으면 반야화(般若火)라 한다. 이것은 손가락을 태우고 신명을 아끼지 않으며, 사지를 마디마디 찢고, 세간을 벗어나며 저 세계에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오장육부에 12분교와 유·무 등 모든 법을 털끝만큼이라도 남겨 두었다면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하고 얻을 것이 있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여우라고 한다. 이제 오장육부에 아무 구할 것도 얻을 것도 없다면 대시주(大施主)이며 사자후이다. 이 사람은 또한 얻을 것이 없는 거기에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니 육절사자(六絶獅子)라고 부른다.

   너다 나다 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모든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겨자씨에 수미산을 받아들이면서 일체 탐·진·팔풍(八風) 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입 속에 큰 바위의 물을 머금으면서 일체 허망한 말은 귀에 받아들이지 않으며, 몸으로 남에게 전혀 나쁜 짓을 하지 않아서 모든 불을 뱃속에 넣은 듯이 한다.

   이렇게 낱낱의 경계에 혹하지 않고 성내지도 기뻐하지도 않으며 자기 육근문두(六根門頭)에서 깎아내고 정화하면 일 삼을 것 없는 사람(無事人)으로서 모든 알음알이(知解)를 극복하고 두타행(頭陀行) 정진한다 하겠다. 이를 천안(天眼), 또는 분명히 관조함으로써 눈을 삼는다(了照爲眼)고 한다. 또한 법계성(法界性)이라 하니, 수례를 만들어 인과를 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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