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마당에서는 옛날부터 익숙했던 길을 찾아간다 해도 오히려 끝까지 가지 못하는데, 그때 가서 새로 조복하여 공부한다면 기약이 없다. 죽는 순간에는 좋은 경계가 한꺼번에 눈앞에 나타나는데 마음으로 더 좋아하는 곳을 먼저 받게 된다. 지금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도 나쁜 경계가 없고 설사 나쁜 경계가 있다 해도 좋은 경계로 변한다. 죽는 순간에는 두렵고 미친 마음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낱낱의 경계법에 아무런 애욕과 물들임이 없다 해도 그렇다는 생각에 머물지 말아야 자유인이다. 지금은 인(因)이고 죽음은 과(果)인데 과업(果業)이 나타나면 어째서 두려워하는가. 옛과 지금이 달라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에도 지금이 있다면 지금에도 옛이 있을 것이며, 옛날에 부처가 있었다면 지금도 부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유를 얻는다면 미래 세상까지 자유로울 것이다.

   한 생각 한 생각이 유·무 등 모든 법에 매이지 않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부처가 사람이고 사람이 부처일 뿐이다. 이것이 삼매정(三昧定)이기도 하니, 정(定)을 가지고 정에 들어갈 필요가 없고, 선(禪)을 가지고 선을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부처를 가지고 부처를 찾을 필요도 없다.

   다음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법은 법을 구하지 않고, 법은 법을 얻지 않으며, 법은 법을 행하지 않고, 법은 법을 보지 않아서 자연히 법을 얻는 것이지, 얻음으로써 다시 얻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렇게 바르게 법을 사유하여 독존해야 하며, 독존한다고 인식하는 법지(法智)도 없어야 한다. 본성은 그대로가 여여(如如)하여 인(因)에 의해 자리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체결(體結)또는 체집(體集)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지혜로 알 수도 없으며 식(識)으로 분별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사량이 끊긴 곳이며 응적(凝寂)한 자체가 다하여 헤아림이 영원히 없다. 마치 바다에서 큰 물결이 다하면 파랑이 다시는 생기지 않는 것과도 같다."

   또 말씀하셨다.
   "큰 바닷물에 바람이 없다가 홀연히 소용돌이가 생기면 그것이 생긴 줄을 안다하니, 이것은 미세한 가운데 거침(細中之 )이다. 앎에서 앎이 없어져 여여(如如)함으로 돌아감은 미세한 가운데 미세함(細中之細)이니, 이것은 부처의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아는 것이니 이를 최고의 삼매(三昧之頂), 삼매왕(三昧王) 또는 이염지(爾 智)라고도 한다. 이것이 모든 삼매를 내고 모든 법왕자(法王子)를 관정(灌頂)하며·색·성·향·미·촉·법 모든 국토에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안팎으로 통달하여 어디든 막힘이 없다.

   일색(一色)이 일진(一塵)이고 일불(一佛)이 일색(一色)이며 일체불(一切佛)이 일체색(一切色)이고, 일체진(一切塵)이 일체불(一切佛)이다. 또한 모든 색·성·향·미·촉·법도 이처럼 낱낱이 모든 세계에 두루 가득하다.

   이는 미세한 가운데 거친 것으로서 좋은 경계이니, 모든 상근기가 알고 느끼고 보고 듣는 것이며, 모든 상근기가 생사에 드나들면서 일체 유·무들을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상근기가 설명하는 것이며, 상근기가 드는 열반이며, 더할 것 없는 도이며, 견줄 것 없는 주문(呪)이다. 모든 말씀 가운데 으뜸가는 가장 심오한 말씀으로 다다를 사람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이 아껴주신다. 마치 맑은 파도가 맑고 흐리며 깊고 넓은 물의 모든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이 아껴주는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당장 깨끗하고 밝은 몸을 나타낼 것이다.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