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알고 절로 깨닫는 이것이 자기 부처인 줄 전혀 알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려 부처를 찾는다. 선지식의 설법을 의지하여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 나오게 하는 약을 지어 밖으로 치달려 구하는 병을 치료한다. 이윽고 밖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게 되면 병이 나았으니 약은 버려야 한다.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데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선병(禪病)이며, 영락없는 성문이다. 마치 물이 얼음이 되면 얼음 자체가 물이긴 하나 목마름을 풀어주기 어려운 것과도 같으며, 또는 꼼짝없이 죽을병이라 하기도 하니 세상 의원들도 속수무책일 뿐이어서 원래 이들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부처란 중생 편에서 쓴 약이니 병이 없으면 먹을 필요가 없다. 약과 병이 함께 없어지면 맑은 물과 같다. 부처란 감초를 넣은 물이나 꿀물과도 같아 매우 달콤한 것이나 맑은 물 쪽에서 보면 원래 없다거나 있다거나를 집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이 이치는 누구나 본래 가진 것이며, 모든 부처와 보살은 구슬(珠)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원래 어떤 물건이 아니므로 그것을 알 필요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상대적인 개념 (兩頭可)을 끊기만 하면 된다. 있다느니 있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끊고, 없다느니 없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끊으면 양쪽의 자취가 나타나지 않아 양쪽에서 그대를 잡아당겨도 끌리지 않으며, 어떠한 테두리(量數)도 그대를 얽어매지 못한다. 그리하여 부족하거나 완전하지도 않고 범부(凡夫)도 성인(聖人)도 아니며 밝음도 어두움도 아니다. 앎이 있음도 앎이 없음도 아니고, 얽매임도 해탈도 아니어서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어째서 실다운 말이 아닌가. 허공을 다듬어 불상을 만든다 든가 허공을 청·황·적·백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고 비유할 수도 없으므로, 법신은 함이 없어 어떠한 테두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法身無爲不墮諸數)"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인의 몸은 이름이 없어 설명할 수 없으며, 실다운 이치인 공문(空門)에는 닿기 어렵다. 마치 어디든지 앉을 수 있는 파리도 불꽃 위에는 앉지 못하듯 중생도 그러하여 어디든 반연(攀緣)할 수 있으나 반야(般若)에는 반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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