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불법과 세속을 가려야 하고, 총론과 각론을 나누어야 하며, 궁극적인 교설(了義敎語)인지 방편교설(不了義敎語)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궁극적인 교설로는 맑음을 논하고 방편교설로는 탁함을 논하며, 염법(染法) 쪽의 허물을 설명하여 범부를 가려내고, 정법(淨法) 쪽의 허물을 설명하여 서인을 가려내야 하니, 이것은 9부교(九部敎:교학의 총칭)에 입각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목전의 눈 먼 중생에게는 선지식의 지도를 받게 해 주어야 하며, 귀머거리 속인 앞에서 말할 경우에는 직접 그를 출가시켜 계율을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으며 지혜를 배우게 해 주면 된다. 한편 테두리를 벗어난 범부에게는 그런 식으로 지도해 서는 안되니 유마힐(維摩詰)이나 부대사(傅大士) 같은 부류가 여기에 해당한다. 백사갈마(白四 磨)를 받은 사문 앞에서 말할 경우, 그들은 계·정·혜(戒定慧)의 힘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으니, 다시 그런 식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을 맞지 않는 말(非時語)이라 할 것이며, 맞지 않는 설명이므로 꾸며서 하는 말(綺語)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문에게라면 청정한 법 쪽의 허물을 설명해야 한다. 즉 있다 없다(有無)하는 등의 법을 여의고, 닦고 증득하는(修證) 모두를 떠나며, 그것을 떠났다는 것조차 떠날 것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물든 습기(習氣)를 깎아 없애려는 사문도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없애버리지 못했다면 역시 귀머거리도 속이라 할 것이니, 그에게도 선정을 닦을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한다.
  
   이승(二乘)의 경우는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다 쉬어 버렸으나 탐내는 마음이 없어진 경계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나 이는 무색계(無色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광명을 가리고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므로 그에게도 선정을 닦고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하며, 깨끗하고 더러움을 구별해 주어야 한다. 더러운 법이란 탐욕·성냄.·애착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우며, 깨끗한 법이란 보리·열반·해탈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운다. 여기에서 비추어 깨달으면(鑑覺) 깨끗하고 더러운 양쪽 갈래와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법과 색·소리·냄새·맛·촉감·생각과 세간·출세간법에 털끝만큼의 애착(愛取)도 전혀 없게 된다. 이미 애착하지 않게 되고 나서는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는데 그것을 처음선(初善)이라 한다. 이것은 조복된 마음(調伏心)에 안주하는 것이며 뗏목이 아까와 버리지 못하는 성문으로서 이승(二乘)의 도이며, 선나과(禪那果)이다.
  
   애착하지도 않고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지도 않으면 이를 중간선(中善)이라 한다. 이는 반자교(半字敎)로서 아직은 무색계(無色界)이나 이승과 마군의 도에 떨어짐은 면하였으나, 선병(禪病)과 보살의 속박이 있다.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 앉지도 않고 눌러앉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지막선(後善)이라 한다. 이는 만자교(滿字敎)로서 무색계(無色界)에 떨어짐을 면하고, 선을 닦는 병통에 떨어짐을 면하며, 보살승에 떨어짐을 면하고, 마왕의 지위에 떨어짐을 면한다. 그러나 지혜(智)에 막히고 지위(地)에 막히고 행(行)에 막혀 자기 불성(佛性)을 보는 데에는 마치 밤에 무엇인가를 보는 것과 같다.
  
   불지(佛地)에서 두 가지 어리석음(二愚)을 끊는다 하는 경우는 첫째 미세소지우(微細所知愚), 둘째 극미세소지우(極微細所知愚)이다. 그러므로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미진(微塵)을 타파하여 경전(經卷)을 벗어났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가령 이 3구(三句:세 가지 善)를 꿰뚫어 세 단계에 매이지 않는다면 교학(敎家)에서는 그것을 세 번 뛰어 그물을 벗어난 사슴에 비유하며 번뇌를 벗어난 부처라고 하는데 그를 구속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연등불(然燈佛)의 뒷 부처님에 속하며, 최상승(最上乘), 상상지(上上智)로서 불도 위에 선 것이다. 이 사람은 불성을 가졌으며 스승(導師)으로서 막힘 없는 바람과 막힘 없는 지혜를 구사한다. 뒤에 가서는 인과와 복덕·지혜를 자재하게 굴리니, 수레를 만들어 인과를 실어 나르며 삶에 처하여도 삶에 매이지 않고 죽음에 처하여도 죽음에 매이지 않으며, 5음(五陰)에 처하여도 문이 여닫히듯 5음에 매이지 않아, 가고 머묾에 자유롭고 드나듦에 어려움이 없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지위와 우열을 논할 것이 없으며 개미 몸을 받아서까지도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모두 불가사의한 정토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는 속박을 풀어주는 말일뿐이니 저들 스스로에게 부스럼이 없다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부처다 보살이다 하는 것도 부스럼이니, 있다 없다는 식으로 법을 설명했다 하면 모조리 긁어 부스럼이 되는 것이다. 일체법은 모두 유·무(有無)에 포함되는데, 10지보살(十地菩薩)은 탁류(濁流)가 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청류(淸流)가 된다. 맑은 모습은 곱게 설명하지만 그것은 흐린 쪽의 허물만 말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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