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거제요연조봉(巨濟了然朝奉)에게 주는 글


  자기 자신 속에 각자 이 한 덩어리[此段]를 갖추고 있으나 다만 숙세에 선근을 깊고 두텁게 심은 사람만이 세제(世諦)에 인연이 가볍다. 역량을 갖추어 스스로 헤쳐나아가 오랫동안 뒤로 물러나서 고고하게 운행하고 홀로 관조한다. 그리하여 3업(三業)을 청결히 하고 단정히 앉아 참구하면서 오묘하게 살펴서 명쾌하게 벗어난다. 자기 분상에서 견해를 여의고 망정을 끊어 만 길 절벽에 서 있는 듯하다.

  시작 없는 때부터 익혀온 깊은 습관과 악각(惡覺)을 놓아버리고, 아상(我像: 아견)을 부수며 애견(愛見)을 고갈시키고 단박 깨치면, 모든 성인도 어찌할 수 없으며 만물도 그것을 덮어 숨겨버릴 수가 없다.

  하늘 끝까지 빛나고 땅 끝까지 환하게 비춰 옛 불조께서 똑바로 지적하신 오묘하고 단엄청정하여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정체를 백 겹 천 겹 쌓여 분별할 수 없는 곳을 향하여 착안하고, 종횡 무진하여 끝내 갈라놓을 수 없는 곳에서 칼을 놀린다. 기봉은 사물보다 앞서 나오고 말은 생각을 초월한다. 쇄쇄낙락하여 맑고도 맑아서 변통하고 움직임에 자유롭고 역량의 작용이 활발하게 벗어났다.

  예로부터의 깨달은 상류들과 같이 체득하고 같이 작용함이 전혀 차이도 없고 구별도 없다. 무심한 경지에서 다만 고요묵묵함을 지킬 뿐 애초에 칼끝을 드러내지 않아 흡사 어리석은 사람 같다. 인연 따라 널리 놓아버려, 주리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다. 이는 이른바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하고 대중을 술렁이게 하지 않고 가만가만히 작용을 드러내어 큰 기틀〔大機〕을 발현한다”한 것이다.

  오래토록 익어서 편안하고도 한가하며 온밀하면서도 참다운 경지에 도달하면, 다시 무슨 한가로이, 여기서는 부숴버렸다느니 저기서는 번뇌, 생사에 구속됨 등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옛날의 도 있는 어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6근과 6진을 벗어나게 하고서는 밀인(密印)을 널리 폈다. 30년이고 20년이고 싸늘하고 고요한 경지의 공부를 하게하며, 가는 털끝만큼이라도 알음알이가 조금이라도 있기만 하면 당장 바로 쓸어버리며, 쓸어버린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생사의 저편에서 손을 놓아 전신을 놓아버리고 마침내 꿋꿋이 단단한 경지에서 큰 자유를 얻게 하였다. 다만 이러한 책략이 있다는 걸알까 염려스러워 할 뿐이니, 알았다 하면 큰 화근이 된다. 비로소 이렇게 해야만 진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였느냐. 왕노사(王老師: 남전스님), 조주(趙州), 동산(洞山), 투자(投子)스님들은 모두가 무심의 경계를 찬탄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실로 후학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랐던 것을.

  가령 기관(機關), 언어, 변혜(辯慧), 지해(知解)를 드러냈더라면 바로 심전(心田)을 더럽힌 셈이니, 끝내 영산의 염화와 소림의 면벽같은 부류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천착하여 본분을 의지하지 않는다. 이는 입으로 성색(聲色)을 더듬고 작용하는 짓이란 것을 몰랐다 하리라. 이것은 참으로 뇌(腦)를 찔러서 아교 항아리 속에 다 부어 넣는 것과 아주 흡사한 것이다.

  준수한 부류라면 그는 응당 그러하진 않으리라. 이미 살피고 검토했으니 반드시 원대한 것에 뜻을 두어, 머리를 맞대고 참됨을 실험한 자리에 도달해야 한다. 때문에 체득한 사람은 콧물 흐르는 것은 닦지만 공부할 것은 없는 것이다. 말해 보라. 그는 어느 곳을 밟고 가는지를!

  교 밖에 홑으로 전한 것을 알려 하느냐? 섣불리 알아차리고 허공을 바라보며 움켜쥐고 더듬는 것이 아니다. 낱낱이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꿰뚫어 천지를 덮으면서 사자새끼처럼 자재롭게 유희한다. 분명히 툭 트일 때는 똑바로 분명히 툭 트이고 면밀한 곳에서는 곧바로 면밀하다.

  다만 한 덩어리 자기 발아래 있는 것이지만, 구경에 이르러선 모름지기 스스로 정신을 차려야만 진실을 수용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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