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허봉의(許奉議)에게 드리는 글


  이 일은 날카로운 지혜를 가진 상근기에게 있는 것으로서 하나를 듣고 천을 깨닫는 것이 어렵지 않으니, 요컨대 서 있는 자리를 견고히 하여 확실히 믿고 꽉 잡아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맞고 거슬리는 모든 경계와 갖가지 인연들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마치 허공에 실낱만한 장애도 없듯 텅 비고 밝아 전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렇듯 백겁천생이 시종여일해야 평온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총명하고 민첩한 사람이 근기가 들뜨고 근본이 얕아서 말 위에서 전변할 줄 알고 세간에서는 가히 숭상할 만한 게 없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마침내는 견해의 가시를 키우고 능력과 알음알이를 내보이며 잽싸고 영리하게 언어를 사용하면서 불법이란 이러할 뿐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경계 인연이 생기면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서 진퇴를 이루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모든 마구니와 어려움을 일찍이 두루 다 겪었으니, 일곱 토막으로 잘리워도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한번 마음을 다잡으면 마치 철석같았습니다. 나아가 생사를 투철히 벗어나는 데 이르러서는 전혀 힘을 들이지 않았으니, 어찌 식정을 초월하여 강개한 뜻을 지닌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재가보살이 출가한 수행을 닦는 것은 마치 불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대체로 이름과 지위, 권(權)과 실(實)의 의기(意氣)를 졸지에 조복받기는 어려운데, 더구나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번거롭고 시끄러움이 백천 갈래로 지지고 볶는 경우야 말해서 무엇하리요!

  오로지 본래 참되고 오묘하고 원만한 자기 자리에서 당장 크게 쉬어버린 대적정삼매의 경계에 도달하고, 나아가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텅 비어 평등하고 항상하며, 무심(無心)을 철저하게 깨닫고 일체 법을 꿈이나 허깨비처럼 여깁니다. 텅 비고 툭 트인 경지에서 인연 따라 세월을 녹인다면 유마힐(維摩詰)·부대사(傅大士)·배상국(裴相國)·양내한(楊內翰)등 여러 훌륭한 재가(在家)의 수행인들과 그 정인(正因)을 함께 할 것입니다. 자기의 역량을 따라 깨닫지 못한 사람을 교화하여 함이 없고 아무 일 없는 법성(法性)의 바다 속으로 함께 들어간다면 남섬부주를 한바탕 뛰쳐나온다 해도 본전을 밑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법은 대단할 것이 없으니 구지(俱 )스님은 한 손가락만 세웠고, 타지(打地)스님은 땅만 쳤으며, 조과(鳥 )스님은 실오라기를 입으로 불었고, 무업(無業)스님은 망상 피우지 말라 하였으며, 중읍(中邑)스님은 시끄럽게 재잘거렸으며, 고제(古提)스님은 불성이 없다 하였고, 골좌(骨 )스님은 일생동안 뼈가 꺾인다고만 말했을 뿐입니다. 다만 믿음으로써 여기에 이르렀을 뿐이니, 때문에 일생동안 써먹어[受用]도 다 쓸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의심을 내면 다른 견해 및 차별이 생겨 향상이니 향하니 하는 것이 있게 되니, 어떻게 그 향상 향하를 타고 앉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래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니, 이것이 사람 얻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이미 들어갈 곳을 알아 근원이 밝아지면 만 길 벼랑처럼 높고 아득하게 씻은 듯 초탈해야 합니다. 부처병·조사병을 버리고 현묘한 이치와 성품도 버리고 한가로이 호호탕탕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촌구석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길러 나가다 보면 소박하고 진실하며 매우 안온하여 바야흐로 안락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자기를 노출하여 총명한 체 하거나 책략을 드러내 지견(知見)을 자랑하며 결코 구두선(口頭禪)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열 번 말하여 아홉 번 들어맞는다 해도 한 번 말 없느니만 못하다고 하였고, 또 "나는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백천 명이나 보았지만 그 가운데서 무심도인은 한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해나가면서도 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덕에 머물지 않는 것을 '모양 없는 진실한 수행'이라 이름합니다.

  큰 코끼리는 강을 건널 때 물결을 끊고 지나가는데, 이렇게 수행 실천해 가면 물이 방울마다 얼듯 가슴 속에 자취를 남겨두지 않거니, 하물며 특별히 마음을 일으켜 모든 죄악을 짓는 경우이겠습니까. 이미 이처럼 깨달음을 간직하고 또한 이처럼 깨닫지 못한 이를 격려하다 보면, 문득 위에서 바로 조복되고 믿음이 순숙하여 함이 없고 하릴없어지리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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