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수도하는 약허암주(若虛菴主)에게 주는 글


  도를 배우는 납자들이 처음에는 신심과 취향이 있어 세상의 번거로움과 더러움을 싫어하며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할까를 늘 염려한다. 그러다가 이미 스승의 지도를 받게 되거나 혹은 자기 자신으로 인하여 원래부터 각자에게 갖추어진 완전하고 묘한 진심(眞心)을 밝혀서 경계나 인연을 만나면 스스로 귀착점을 알아서 그대로 간직하여 안주하려 하니,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드디어 고정된 형식을 만들까 염려스럽다. 마침내 기연 위에 조(照)와 용(用)을 세우고 혀를 차고  손뼉을 치며, 눈을 부릅뜨고 눈썹을 날리면서 한바탕 유난을 떤다.

  그러다가 다시 본색종장을 만나 수많은 알음알이를 모조리 들추어내어 단박에 본래의 함이 없고 하릴없는 무심한 경계에 계합한 뒤에야 부끄러움을 알고 쉴 줄을 알게 된다. 한결같이 그윽한지라. 모든 성인도 그이 일으킨 곳을 찾지 못하는데, 더구나 그 나머지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때문에 암두스님은 말하기를, "저 체득한 사람은 한가한 경지만 지킬 뿐 하루 종일 하고자 함도 없고 의지함도 없다"하였는데, 이야말로 안락법문이 아니겠는가!

  옛날에 관계(灌溪)스님이 말산(末山)비구니 스님에게 갔더니 말산스님은 물었다.
  " 방금 어디에서 왔는가?"
  관계스님은 말하였다.
  " 길 입구에서 옵니다."
  " 왜 덮어버리질 못하는가?"
  관계스님은 대꾸가 없었다.

  다음날 "어떤 것이 말산의 경계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말산스님은 말하였다.
  " 꼭대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 무엇이 산중 사람입니까?"
  " 남녀 따위의 모습이 아니지."
  " 왜 변화하질 않습니까?"
  " 신(神)도 아니고 귀(鬼)도 아닌데 무엇을 변하겠는가?"

  이러한데 어찌 실제의 경지를 밟지 않고 만 길 절벽 같은 곳에 도달하지 않았으랴! 그러므로 "마지막 한마디라야 비로소 굳게 닫힌 관문에 도달하여 요충지를 차지하고서 성인이든 범부든 통과시키지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옛사람은 이미 그러하였는데, 요즈음 사람인들 어찌 조금이라도 부족하랴. 다행히도 금강왕 보검이 있으니, 지음(知音)을 만나면 반드시 꺼내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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