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후기  


  이 《육조단경》은 상좌인 법해法海 스님이 기록을 모은 것이다.
제일 앞에 나왔지요. 소주 지사 위거가 법해 상좌에게 부탁해서 기록한 것이 《육조단경》입니다.

  상좌가 돌아가자 같이 배운 도제道寓에게 부촉하였고, 도제가 돌아가니 문인 오진悟眞에게 부촉하였다. 오진은 영남 조계산 법흥사에서 지금 이 법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해, 도제, 오진 세 분 스님에 걸쳐 이 《육조단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육조단경》이 육조 스님 돌아가시고 60년 후에 나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내용으로 봐서 맞는 것 같아요.

  만약 이 법을 부촉하려면 모름지기 상근기의 지혜라야 하며, 마음으로 불법을 믿어 큰 자비를 일으키고 이 경을 가지고 의지해서 계승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않았다.
  상근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육조 스님은 이 법을 믿고 공부하는 사람이 상근기라 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 법을 믿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건 상근기가 아닙니다. 상근기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법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 상근기입니다.

  스님은 본래 소주 곡강현 사람이다. 여래께서 열반에 드시고 법의 가르침이 동쪽 땅으로 흘러와서 함께 머무름 없음〔無住〕을 전하니, 곧 나의 마음이 머무름 없음이다.
  여기에 다시 무주無住를 강조합니다. 이 법이 어디에 머무르면 그건 잘못된 거예요. 우리 생각도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를 반복하고 있지요?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을 설명해 놓은 것이 부처님 법이거든요. 부처님 법은 무주無住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무주無住로 본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를 삼고,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는다”고 했지요.
  “내 마음이 무주다.” 항상 흘러가고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쓴 소설 《싯달타》를 보면 흘러가는 물을 보면서 공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 의식도 그렇게 계속 흘러가는 거예요. 의식뿐 아닙니다. 우리가 무상한 겁니다. 또 무아죠.

  이 진정한 보살이 참된 종지를 설하고 진실한 비유를 행하여 오직 큰 지혜의 사람만을 가르치나니, 이것이 뜻의 의지하는 바다.
  무릇 제도하기를 맹세해서 수행하고 수행하되,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괴로움을 만나서도 능히 참으며,
  이게 평범하지만, 정말로 유용한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피해서 도망가 버리거든요. “어려운 일 만나더라도 물러가지 말라.” 어차피 가야 할 길이니까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복과 덕이 깊고 두터워야 바야흐로 이 법을 전할 것이다.
이런 사람한테 법을 줘야 합니다.

  만약 근성이 견디지 못하고, 재목이 되지 못하면
왜 견디지 못하느냐 하면,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으면 다 감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실천하면 이런 자질도 다 갖추고 또 감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모름지기 이 법을 구하더라도, 법을 어기는 부덕한 사람에게는 망령되이 《육조단경》을 부촉하지 말아라.
  그런 사람에게 《육조단경》을 부촉하면 오히려 욕된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견성했다고 해요. 앞에서 누차 말했듯이 달과 손가락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인됐다고 하는데 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육조단경》을 부촉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도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그 비밀한 뜻을 알게 하노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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