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참청參請(2) 예배하고 법을 물음

  또, 한 스님이 있으니 이름이 신회神會로 남양 사람이다. 조계산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습니까?”
  대사께서 일어나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다시 신회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
  신회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께서는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다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다는 것은 어째서 그러느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無情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범부와 같아 바로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고,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함은 생멸生滅이다.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라. 마음을 깨달아 스스로 보아서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너가 스스로 미혹해서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와서 혜능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아 스스로 아는 것은 너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가 없다. 만약 너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않고 나에게 보는지 안 보는지를 묻느냐?”
  신회가 예를 표하고 바로 문인이 되어 조계산을 떠나지 않고 항상 가까이 모시었다.

  또, 한 스님이 있으니 이름이 신회神會로 남양 사람이다.
신회가 그 유명한 하택 신회(684~758)입니다. 이분이 처음에 육조 스님의 돈오 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신수 스님의 점수를 비판했는데 나중에 어떻게 돈오점수를 주창한 규봉 스님과 맥이 이어져요.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호적이라는 현대 중국학자가 그런 주장을 했는데, 또 어떤 학자는 그걸 잘못 봤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법으로는 맞지 않아요. 그래서 학자들이 이분에 대해서 좀 깊이 연구해줬으면 좋겠어요.

  조계산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습니까?”
  마음을 봅니까? 안 봅니까 하는 겁니다.

  대사께서 일어나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다시 신회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
  신회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께서는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다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

  굉장히 의미 깊은 대목이죠. 육조 스님께서 신회를 만난 이때는 이미 도인이 되어 교화할 때예요. 도인이 안 되었을 땐 ‘내가 항상 나의 허물을 본다’ 하면 이해가 되는데 도인이 된 분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또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이나 죄를 보지 않는다’라고 하셨고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도인된 분이 어째서 허물이 있을까요? 허물이 없지요. 그런데 ‘나의 허물을 본다.’ 또 도인 안 된 중생은 허물투성이인데도 ‘허물을 안 본다’라고 하셨어요. 중생의 허물을 안 본다는 것은 중생도 본래 성불되어 있으니까, 본래 부처로 보면 허물이 없다. 이것은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도인이 왜 ‘자기 허물을 본다’고 했을까요?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얘기인데요. 도인이 허물이 있어 그런 게 아니고 삼라만상 유정, 무정이 다 성불해 있는데 육조 스님께서  늘 하시는 소리가 뭐예요. ‘양변을 여의어라’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라’ ‘일불승을 행하라’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본래 부처한테 말이에요.
  그래서 향곡 스님 그러시더군요. 《선요》에도 비슷한 게송이 나와요. “울어서 피눈물을 흘리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啼得血流無用處〕. 입 다물고 남은 해를 보내는 것과 같지 못하다〔不如緘口過殘冬節〕.” 이 말은 도인이 중생을 위해 정말로 안타깝고 애달파서 울어 피눈물을 흘립니다. 육조 스님도 중생을 위해서 눈만 뜨면 고구정녕하게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라’ ‘일불승을 행해라’ ‘양변을 여의어라’ 얘기하거든요. 그렇게 하기를 피눈물 나게 한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다. 왜 소용이 없겠어요? 이것은 손가락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달 입장에서 봐야 합니다.

  《간화선》 책 보셨어요? 앞부분에 조사선을 보면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劒)’ 얘기가 나오고 그 다음이 도인이 중생을 위해 법을 설했는데 그걸 듣고 깨달았다 하더라도 맨살을 긁어 상처 낸 것과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게 전부 통하는 말입니다.
  실제 우리가 다 부처인데 부처 앞에서 부처 되라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멀쩡한 맨살을 긁는 것과 같은 것이죠. 이걸 도인들은 허물로 봅니다.

  그래서 옛날에 도인道人을 세 부류로 나눴거든요. 출세하는 도인·출세 안 하는 도인·역행逆行하는 도인 이렇게 나눴는데, 출세하는 도인은 뭐냐? 요즘 방장, 조실하는 분이 출세하는 도인이에요. 그런데 교화하고 출세하는 도인보다도 출세 안 하는 도인을 더 높이 보았어요. 그분은 허물을 안 짓잖아요.
  《벽암록》에 나오는 일화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옛날에 나찬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혜충 국사의 도반인데 국사가 입적하면서 후임으로 나찬 스님을 추천했어요. 그땐 나찬 스님이 누구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초빙코자 하는데 세 번이나 모시러 가도 나찬 스님이 안 나와요. 그러면서 황제 욕은 못 하고 혜충 국사를 명리승名利僧2)이라고 욕을 했어요. 마지막 세 번째로 사신이 왔을 때 나찬 스님께서 감자를 소똥 불에 구워먹고 있어 입가에 시커먼 게 묻었고 게다가 콧물이 턱 밑으로 흐르고 있었답니다. 사신이 볼 때는 정말 국사감이 아니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황제가 세 번이나 보내니까 할 수 없이 높은 산에까지 올라와서 모시고 가려는데 막상 이런 분을 국사로 모셔야 하나 하는 한심한 생각도 들었겠지요. 그래서 부화가 나고 해서 스님을 놀리려고, “스님! 코나 닦고 감자 드시지요” 그러니까 “너 보기 좋으라고?” 그렇게 대꾸했데요. 나는 아무 상관없다는 거지요.
  이렇듯 세상에 나오지 않는 도인을 굉장히 높이 보았어요. 우리가 출세해서 교화하는 것도 도인들은 허물로 봅니다. 그분들이 욕하기 위해 허물을 보는 게 아니고 우리 본분자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말을 씁니다. 거기에도 깊은 자비심이 있어요.

  여기에도 보면 육조 스님께서 신회 스님을 만났을 때가 거의 입적에 가까운 때였거든요. 그런데 자기 허물은 보고 허물투성이인 중생은 죄가 하나도 없다, 안 본다, 이렇게 얘기하고 계셔요. 이 말 속에 굉장한 법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달의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요. 손가락 입장에서 보면 거꾸로 보이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도인의 시각이고, 선의 입장입니다. 철저히 본래성불의 입장에서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선 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아직 이런 것을 모르는 분들도 많아요. 남에게 법문할 정도가 되려면 이 정도의 안목은 갖추고 해야 합니다. 공부 좀 했다는 분들이 옛 조사 스님께서 달 입장에서 하신 게송을 인용해서 그것을 손가락으로 끌어내려 해석하는 분들이 더러 계신데, 그것은 굉장히 잘못한 거예요. 그러면 선에 대한 혼란이 옵니다. 문제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의 구업은 더 말할 게 없고요.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다는 것은 어째서 그러느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無情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범부와 같아 바로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아프지 않다고 하면 아무 생각 없는 목석木石과 같고, 아프다 생각하면 때린 사람한테 미운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무정물과 유정물, 중생과 부처를 나눠 보는 겁니다. 이 대목으로 보면 신회가 소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고,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함은 생멸生滅이다.
  이 대목이 좀 문제인데요, 본래는 “양변을 여읜 것이고” 해야 맞지요. 그런데, ‘양변’이라 했어요. 우리는 ‘양변을 여읜 것’으로 이해합시다. 육조 스님께서 보고 안 보고 하는 것은 법을 보아 양변을 여읜 입장에서 하시는 말씀인데, 신회는 법 근처도 못 간 소견 가지고 아프기도 안 아프기도하다는 말을 하니까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꾸짖습니다.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너는 생멸의 양변을 여읜 그 자성 자리를 보지도 못하고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는가, 신회를 야단치는 것이죠.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라. 마음을 깨달아 스스로 보아서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여기 말한 수행도 아까 말한 평상심을 말하는 겁니다.

  네가 스스로 미혹해서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와서 혜능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아 스스로 아는 것은 너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가 없다. 만약 너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무슨 말이냐? 스스로 미혹해서 너의 마음도 못 보고 와서 혜능이 보는가 안 보는가 묻는 것을 꾸짖고, 내가 스스로 아는 것으로 너의 미혹함을 해결해줄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스스로 닦지 않고 나에게 보는지 안 보는지를 묻느냐?”
신회가 예를 표하고 바로 문인이 되어 조계산을 떠나지 않고 항상 가까이 모시었다.
  우리도 육조 스님 가르침처럼 선지식으로부터 길을 배우더라도 오직 스스로 닦아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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