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부처님의 행佛行(3)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자리에 부처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내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니,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속에서 나오는 것〔出世〕이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법이다. 아래를 향해 삼승을 나눔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것이니, 너는 오직 일불승만을 의지하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려지게 된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이것이 바로 경을 굴리는 것이다.”

  법달은 한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言下大悟〕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고, 7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생각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다.”

  그때 듣는 사람이 깨치지 못한 이가 없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자리에 부처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내지 않기를 바란다.

  육조 스님께서 바라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항상 부처님의 지견을 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양변을 여의면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고, 양변에서 사고하면 중생의 지견을 여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양변을 여의라’고 했습니다만, 이것이 굉장히 어렵지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양변을 여의기 위해서 참선하고 봉사하고 간경하고 염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불, 봉사, 간경, 참선한다고 다 양변을 여의는 것이 아니지요. 어떻게 하면 양변을 여의는 데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빠르게 들어갈 수 있느냐? 정견正見을 세워야 합니다. 내가 무아無我라는 정견을 세우지 않고, ‘내가 있다〔有我〕’는 생각으로 봉사, 간경, 염불, 참선을 하면 절대 양변을 여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수행을 하면 어떤 폐단이 생기느냐? ‘내가 있다’고 보면 자꾸 비교하게 되면서 수행보다 내 밖의 조건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 조건이 물질, 명예 같은 것이죠. 그래서 자꾸 그쪽으로 신경이 갑니다. 수행을 하다가 장애를 만나면 쉽게 물러섭니다. 또 열심히 하더라도 하심하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아만이 더 두터워집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수행을 하니까, 나는 남보다 더 잘한다, 열심히 한다는 교만심이 붙게 됩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은 수행을 아무리 열심히 지속적으로 하더라도 아상이 강하고 화를 잘 내며, 명예욕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연기로 존재하니 실체가 없다, 무아다, 이런 정견이 확고히 선 사람이라야 내면의 양변을 여의는 그 가치를 알고 열심히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양변을 여읜 그 자리의 가치를 알고 참선, 염불, 간경, 봉사를 하면 더 열심히 하게 되어 양변을 여의는 데 더 빠르게 갈 수 있어요. 내가 무아라는 것을 알고 거기에 믿음을 내어 그것을 깨닫고자 발심하여 열심히 하면 할수록 내 밖의 가치보다도 안에 양변을 여읜 자리의 가치가 정말로 굉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자리의 가치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많은 금·은 보화와도 비교가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해야 합니다. 이런 가치관을 철저히 세우고 참선, 간경, 염불, 봉사할 때에 그것이 양변을 여의어 가는 바르고 빠른 방법입니다.

  혜능 스님께서도 항상 모든 인류가 중생의 지견을 열어서 매일 갈등하고 대립하고 투쟁하고 전쟁하는 그런 세상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중생 지견을 연 사람들이 주도하는 것 같아요. 그 대장이 미국의 부시 대통령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한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공부 많이 한 지식인들이 세상 문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전부 지엽적인 것을 보고 근본을 보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는 공부를 바르게 하여 근본 문제를 말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말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요.

  세상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니,
  마음이 삿된 것은 ‘있다-없다’ 양변에 집착하는 것이고, 마음이 바른 것은 양변을 여읜 거죠. 우리가 ‘있다-없다’ 따지니까 남과 대립·갈등하고 심지어 도둑질도 합니다. 마음이 ‘너다-나다’에 집착하여 어리석고 악을 지으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어요. 양변을 여의고 지혜를 일으켜 비춰 보면 스스로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입니다.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속에서 나오는 것〔出世〕이다.”
여기에 출세出世를 ‘세상에 나오는 것’이라 번역한 분도 있고, ‘세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한 분도 있는데, ‘출가’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양변을 여의어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 출가고, 중생의 지견에 머물러 시시비비나 하고 사는 것은 출가가 아닙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법이다.
《법화경》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래를 향해 삼승을 나눔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것이니,
미혹한 사람을 위해 성문·연각·보살의 세 가지 길을 나누었는데, 이것은 방편으로 한 것이죠.

  너는 오직 일불승만을 의지하라.”
일불승一佛乘이나 일승법一乘法이 같습니다. 일불승이 뭡니까?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려지게 되니,
  내가 일불승이 되어 양변을 여읜 그 마음으로 행하면 오히려 《법화경》을 굴려요. 《법화경》한테 굴려지는 것은 자기가 경전에 갇히는 것이죠. 구속되는 것이고.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는 것이다.
  이 바른 것이 양변을 여읜 것이고, 삿된 것이 ‘나다-너다’에 집착한 것이죠. 《법화경》 굴리는 통 속에 들어가 굴러가는 대로 가면 거꾸로도 가고 옆으로도 가고 굉장히 괴롭겠지요.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된다.”
  앞에 ‘일불승으로 마음을 행한다’는 말이나 또 ‘바르게 한다’는 것이나 ‘불지견을 연다’는 말이 다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부처님 법을 내가 굴려야지 부처님 법에 내가 굴리면 안 되지요. 왜냐? 내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양변을 여의면 부처가 되어 주인으로 모든 것을 구르는 겁니다. 그러면 부처와 미륵보살도 부릴 수 있습니다. 《선요》에 그 말이 나와요. “석가와 미륵이 그를 위해서 병과 발우를 들어주더라도 분에 넘치지 않는다.”5) 요즘은 이런 법문하는 분도 없어요. ‘부처님보다도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공양하는 것이 복이 더 많다. 예를 들어 성문·연각한테 공양하는 것보다 보살한테 공양하는 복이 더 많고, 보살한테 공양하는 것보다 불조한테 공양하는 복이 더 많고, 또 불조한테 공양하는 것보다는 무심도인한테 공양하는 복이 더 많다’6) 하는 말이 바로 이 뜻이에요.
  우리는 어떤 것이든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보다 더한 분이 오시더라도 거기에 굴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굴려야 주인이 되는 거예요.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이것이 바로 경을 굴리는 것이다.”
  여기에 보면, ‘법을 의지하라’ ‘수행’하는 말이 있지요. 그러면 이것은 닦는 것이 아닙니까 하는데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깨친 도인이 부처님한테 향 꽂고 마당에 빗자루 쓰는 걸 말하는 거예요.

  법달은 한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言下大悟〕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고, 7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생각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여기 깨닫고 난 뒤에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修行佛行〕’고 하니, 이게 돈오점수頓悟漸修 아닌가? 이렇게 볼 수 있는데 그 말이 아닙니다. 이것도 부처님한테 향 꽂고 마당 청소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고단하면 잠자는 도인의 평상심平常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다.”
그때 듣는 사람이 깨치지 못한 이가 없었다.
  양변 여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하니, 어떻게 하면 이 양변을 여읠 수 있느냐?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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