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돈수頓修(2) 단박에 닦음   

  대사께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들으니 너의 스님이 사람을 가르치되 오직 계·정·혜를 전한다고 하는데, 너의 스님이 사람에게 가르치는 계·정·혜는 어떤 것인가? 마땅히 나를 위해 말해 보라.”

  지성이 말하였다.
“신수 스님이 말하는 계·정·혜는 ‘모든 악을 짓지 않음〔諸惡不作〕을 계라 하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함〔諸善奉行〕을 혜라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함〔自淨其意〕을 정이라 한다. 이것이 곧 계·정·혜이다’ 라고 합니다. 신수 스님의 말씀은 그렇습니다만, 큰스님의 견해는 어떠한지요.”

  혜능 스님이 대답하셨다.
“그 설법은 불가사의하나 혜능이 보는 것은 또 다르다.”

  지성이 여쭈었다. “어떻게 다릅니까?”
혜능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견해에 늦고 빠름이 있다.”

  지성이 계·정·혜에 대한 큰스님의 견해를 청하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말을 듣고 나의 견해를 보아라. 마음자리〔心地〕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이고, 마음자리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정이고, 마음자리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혜이다.”

  혜능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고, 나의 계·정·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는다.”

  지성이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어떤 뜻입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성품은 그릇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 생각생각마다 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법의 모양〔法相〕을 여의는데, 무엇을 세우겠는가? 자성을 단박에 닦으라〔頓修〕. 세우면 점점이 된다. 그러므로 세우지 않는다.”
  지성은 예배하고 조계산을 떠나지 않고 바로 문인이 되어 대사의 좌우를 여의지 않았다.

  대사께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들으니 너의 스님이 사람을 가르치되 오직 계·정·혜를 전한다고 하는데, 너의 스님이 사람에게 가르치는 계·정·혜는 어떤 것인가? 마땅히 나를 위해 말해 보라.”
  육조 스님이 들으니까 신수 스님이 계·정·혜를 사람들한테 가르친다고 하는데 그 계·정·혜는 어떤 것인지 말해 보라 합니다.

  지성이 말하였다.
“신수 스님이 말하는 계·정·혜는 ‘모든 악을 짓지 않음〔諸惡不作〕을 계라 하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함〔諸善奉行〕을 혜라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함〔自淨其意〕을 정이라 한다. 이것이 곧 계·정·혜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보면 모두 각각이지요. 제악막작도 있고, 중선봉행도 있고, 또 자정기의가 있어 계·정·혜가 다 분리되어 있습니다. 신수 스님은 이렇게 가르쳤답니다.
  이것은 육조 스님의 양변을 여의어 가르치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신수 스님의 악한 것을 안 하고 선한 것을 하라는 가르침은 어찌 보면 달라이 라마의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법문과 같은 것이고, 거기에서 조금 더 나은 것은 자정기의하는 이것이 더 낫습니다. 그런데 육조 스님의 양변을 여의어 그 자리에서 자유자재하는 법과는 차이가 납니다.

  신수 스님의 말씀은 그렇습니다만, 화상의 견해는 어떠한지요.”
신수 스님은 그렇게 가르쳤는데 혜능 스님의 견해는 어떠합니까?

  혜능 스님이 대답하셨다. “그 설법은 불가사의하나 혜능이 보는 것은 또 다르다.”
  지성이 여쭈었다. “어떻게 다릅니까?”
  혜능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견해에 늦고 빠름이 있다.”
신수 스님의 견해는 늦고, 당신의 견해는 빠르다.

  지성이 계·정·혜에 대한 큰스님의 견해를 청하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말을 듣고 나의 견해를 보아라. 마음자리〔心地〕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이고,
  마음자리〔心地〕란 자성 자리, 불성 자리, 양변을 여읜 자리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그릇됨이 없다’할 때 그릇됨이 뭘 말하느냐 하면, ‘나다·너다’ ‘있다·없다’의 양변으로 보는 게 없다는 말입니다. 양변을 여의었기 때문에 그릇됨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마음자리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정이고, 마음자리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혜이다.”
  이것도 세 개로 나눴는데, 만약 우리가 ‘나다·너다’를 초월한 그 자리에서 본다면 옳고 그른 것이 없어요. 그 자리가 바로 계라는 것이죠. 또 ‘나·너’가 없는 그 자리가 양변을 여의었으니 거기에는 시비분별이 다 떨어져 정이고, 또 ‘나·너’를 여의었기 때문에 ‘너다·나다’ 편 갈라 싸우지도 않으니까 어리석지 않지요. 그 자리가 바로 계입니다.
  신수 스님은 세 가지로 나눴지만, 여기는 양변만 여의면 그 자리가 정이고, 거기에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혜이고, 또 그 작용이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다. 양변을 여의면 계·정·혜 삼학三學이 저절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 말씀대로 당신이 보는 그 법은 빠르다는 겁니다.
  그러나 신수 스님은 악한 것을 안 하려고 노력하고,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자정기의하려고 노력하니까 그 자체가 느리다. 또 세 개가 분리되어 따로 따로 수행해야 한다는 거예요. 반면에 양변만 여의면, 그 자체가 계·정·혜 삼학이니 훨씬 빠르고 간결하고 단박에 이루어집니다.

  혜능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고, 나의 계·정·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근기가 약한 사람에게는 ‘나쁜 것을 없애고 착한 것을 하라. 또 더러운 것을 없애고 깨끗한 것, 좋은 것도 찾아라.’ 이렇게 법문을 하지요. 대승의 상근기한테는 양변만 여의면, 그 보기 싫고 나쁜 것도 전부 그대로 변해서 깨끗하고 좋은 것이 되어 버린다. 하나를 배제하고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를 양변만 여의면 바로 변화를 시켜버립니다. 그래서 굉장히 빠르지요.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는다.”
양변을 여의면 계·정·혜도 세우지 않는다. 저절로 계·정·혜가 되어 버리는데 따로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계·정·혜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지성이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어떤 뜻입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성품은 그릇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 생각생각마다 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법의 모양〔法相〕을 여의는데, 무엇을 세우겠는가?
  이 자성 자리에는 지혜다, 열반이다, 견성이다, 성불이다, 계·정·혜다, 중생이다, 부처다, 이런 것이 다 이름이거든요. 이런 것을 다 세우지 않는 자리니까,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생각이 지혜입니다. 그 지혜로 관조한다. 비추어 보는 것이죠. 계·정·혜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것도 법상이 되어버리죠.

  자성을 단박에 닦으라〔頓修〕. 세우면 점점이 된다. 그러므로 세우지 않는다.”
  리가 자성의 양변을 여의면 닦을 것도 없다는 것이죠. 단박에 닦는 돈수頓修라는 겁니다. 닦을 것도 없다. 양변을 여의어 그대로 작용하면 되는데, 여기 ‘닦는다’는 말은 작용한다는 말로 보면 됩니다. 작용하는 그대로 지혜인데, 여기에 뭘 세우고, 닦고 할 것이 있느냐? 꿈을 깨면 그만이지, 꿈 깨고 난 후에 다시 꿈 속에서 하던 것을 안 하겠다고 다른 뭘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 돈수頓修라고 또 뭘 닦는다고 볼지도 모르는데, 이것을 선문禪門에서는 “평상심平常心”이라 하지요. 앞에서 말했듯이 부처님 앞에 향 꽂고, 빗자루 들고 마당 청소하는 평상심, 그리고 앞에 양변을 여읜다는 말은 무심無心이라 합니다.
  그래서 《선요》 마지막에 “무심無心이 도道입니까? 평상심이 도입니까?”하고 질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 돈수는 평상심으로 닦는 게 아니지요. 부처님한테 향 꽂고 마당에 비질하는 것도 전부 돈수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육조 스님은 점수漸修 이야기는 안 하셨습니다. 그러나 빠르고 늦은 차이니까, 사람의 근기에 따라 자기 취향에 맞게 수행하면 됩니다. 불교니 아니니 시비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지성은 예배하고 조계산을 떠나지 않고 바로 문인이 되어 대사의 좌우를 여의지 않았다.
  신수 스님이 “빨리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안 갔어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의리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의리도 법에 입각한 의리가 되어야지 법에 안 맞는 의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또 못 깨친 사람이 법의 의리 흉내낸다고 의리 없이 하는 것도 나쁜 짓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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