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수행修行(5)    


이 세상에 더럽고 나쁜 것에도 다 도가 있다.

  그래서 도道가 별도로 있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나쁘다고 하는 것, 더럽다고 하는 것 속에도 다 도가 들어 있습니다. 흔히 더럽고 나쁜 세계에는 도가 없다고 보고 그걸 없애는 게 도라고 보는데, 그건 낮은 차원에서 하는 얘기입니다. 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대승의 입장에서 보면 더럽고 나쁜 그 속에 도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나쁜 사람은 없다. 죄라는 것도 없다. 그럼 왜, 죄가 있다, 나쁜 것이 있다고 하느냐? ‘내가 있다’고 착각해서 나오는 것이죠. 그건 착각의 세계입니다.
  앞에서 ‘도 닦는 것도 착각의 세계에서 닦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듯이 착각의 세계에서 나쁜 짓 하는 것도 사실이 아니에요. 착각에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착각을 깨는 근원적인 것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치유가 안 됩니다. 부처님처럼 그렇게 근본적으로 치유해야 그것이 영원이 지속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승불교는 그 악한 것, 죄 속에도 도가 있다, 나쁘고 더러운 속에도 도가 있다, 그걸 내버리는 것은 도가 아니다, 도 없는 곳이 없다 이겁니다. ‘나쁘다-더럽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분별하고 있는 것이지, 그 더럽고 나쁜 건 절대 나쁘고 더러운 게 아니에요. 그 본질을 보면 더럽고 나쁜 것이 깨끗하고 착한 것으로 바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선이죠.
  그러니까 여기에서도 어떤 형상이든지 다 도가 있다. 거기에서 찾아라.

일상에서 바른 것을 행하는 것이 도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 바름을 행하는 것〔正行〕이 도다.
  여기에 바름(正)을 행한다 할 때 이 바르다 하는 ‘바를 정正’자는 ‘깨끗하다-더럽다’ ‘좋다-나쁘다’를 초월한 바른 겁니다. 그게 ‘중中’이라 표현할 때도 있고, ‘정正’이라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사실 팔정도八正道의 ‘정正’자도 양변을 여읜 것을 바름이라 합니다.
  이 바른 것을 행하는 것이 도다. 양변을 여읜 그 자리에서 모든 행을 하라. 이게 불교입니다. 만약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게 있고 좋은 게 있어 시시비비를 하여 가린다면 그건 불교가 아니에요. 양변을 여읜 그 자리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때만이 불교적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시비비 가릴 때 안 그럽니다. 나쁜 사람-좋은 사람, 나쁜 일-좋은 일을 나누어 나쁜 일 한 사람은 나쁘다 이렇게 가르지요. 우리가 양변을 여읜 그 자리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다 승복해요. 그렇지 않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나누어 시시비비를 가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 백만 원 훔쳐 교도소 갔다고 하면, 교도소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세상에 차떼기 해 먹은 놈도 있는데 나는 고작 백만 원 가지고 이렇게 억울하게 감옥살이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에 나와서 또 죄를 범합니다. 교도소 간 사람들이 다시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끔 법조인들이 찾아오면 이런 얘기를 해줍니다. 판결할 때 그 사람들이 정말로 인간적으로 승복하도록 그렇게 판결을 해야 명판사다. 다른 사람은 차떼기 해 먹는데 나는 백만 원 때문에 죄를 받으니 억울하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판결하면 그 사람은 다시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 일상생활에도 그런 일들이 참 많습니다.

  남전(748~834) 스님이 고양이 때문에 동당, 서당이 싸우자 고양이 목을 친 법문이 있어요. 동당, 서당이 고양이 하나를 놓고 서로 자기들 것이라고 싸우니까 고양이 목을 쥐고 “한마디 일러라. 못 이르면 고양이 목 쳐버리겠다” 하시고 답이 없자, 목을 쳐버렸어요.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조주(778~897) 스님이 오니까, “낮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남전 스님이 물었어요. 그러니까 조주 스님이 짚신을 벗어서 머리 위에 이고 나가버렸어요.
  고양이를 죽인 것은 살생인데도 바른 것을 행한 겁니다. 어떻게 바른 것을 했다고 할 수 있냐? 남전 스님이 목 친 것이 양변을 여읜 것이란 걸 알게 되면 조주 스님이 짚신을 머리 위에 이고 나간 소식도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냥 장난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남전 스님이 고양이 목을 벤 도리를 알면, 차떼기든 백만 원이든 모두 정正으로 바뀌어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스로 바른 마음〔正心〕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한다.
바른 마음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양변에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양변에서 하게 되면 어두운 곳에서 행하는 것과 같아서 도를 보지 못합니다. 바른 마음이 없으면, ‘나다-너다’를 초월한 그 마음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가기 때문에 갈팡질팡해서 도를 보지 못해요.

  만약 참으로 도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으니
부처님 당시에 외도가 와서 막 욕을 한 적이 있어요.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하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분명히 브라만이라는 진리체가 있는데 왜 당신은 공이라고 하느냐?” 하면서 막 욕을 했어요. 이때 부처님이 그 욕하는 사람의 허물을 봤으면 부처님도 같이 화를 내야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 사람이 양변의 착각에 빠져 욕하고 있으니까 본래는 완전한 사람인데 아기가 떼쓰는 것과 같이 보이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화를 안내요. 상대편이 아무리 잘못해도 우리 본질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 됨이다.
세간의 본질을 못 보고 현상만 보는 걸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만 보고 본래 부처라는 본질을 못 보면 그것은 스스로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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