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수행修行(1)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만약 수행하려면 세속[在家]에서도 가능하니, 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절에 있더라도 닦지 않으면 서방에 있는 마음 나쁜 사람과 같고, 세속에서 수행하면 동방 사람이 착함을 닦는 것과 같다. 오직 원하건대, 자기 스스로 청정함을 닦아라. 이것이 바로 서방극락이다.”

출가와 재가의 수행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만약 수행하려면 세속[在家]에서도 가능하니, 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절에 있더라도 닦지 않으면 서방에 있는 마음 나쁜 사람과 같고, 세속에서 수행하면 동방 사람이 착함을 닦는 것과 같다.
  재가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할 가르침이네요. ‘재가-출가’ 하는 것도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지, 모양에 있는 건 아닙니다.
  ‘절에 있으면서 수행하지 않으면 서방 극락세계의 사람이 마음을 나쁘게 먹는 것과 같다. 재가에서도 만일 수행하면 동방 사람이 선善을 닦는 것과 같다.’ 그래서 출가-재가도 마음에 있는 것이지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재가-출가를 마음은 놔두고 형상만 가지고 얘기하지요? 육조 스님은 철저하게 재가-출가도 정신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이게 바른 말입니다.
  어찌 보면, 출가한 분이 마음을 닦지 않고 밖으로 가치를 추구한다면 더 나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출가할 때 행복을 밖이 아니라 내면에서 찾겠다고 부처님과 약속하고 계를 받았어요. 출가 후에 수행하지 않고 밖으로 세속적인 행복의 조건을 추구하게 되면, 재가에서 수행하는 분들보다 더 위선적일 수 있습니다. 재가에 있는 분들은 부득이 그렇게 살지만, 출가한 스님은 행복의 조건을 밖으로 추구하지 않고 내면에서 찾겠다고 결심한 사람인데 다시 자기 밖의 것을 추구하는 건 잘못된 것입니다.
  육조 스님께서 이 문제를 강조하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수행이 굉장히 중요하지요. 출가자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도 인행因行 당시에 나찰羅刹을 만나 “모든 행이 무상하니 이것이 생멸법이다〔諸行無常 是生滅法〕” 라는 소리만 듣고, 그 다음 게송을 읊어주면 너한테 내 몸을 밥으로 바치겠다고 했지요. 혜가 스님은 달마 스님 앞에서 팔도 끊었고요. “매일 매일 좋은 날”이라 한 운문 스님도 목주 스님의 토굴에 찾아가 한 발 들여놓았는데 문을 닫아 다리가 부러져서 평생 다리를 절고 사셨습니다.
  옛 고인古人과 같이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참선을 하거나, 봉사를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간경을 하거나 불교에서 하는 모든 수행은 자기를 비워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견을 세우고 자기 분야와 능력에 따라 하나라도 열심히 하면 됩니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하는 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빠르고 조금 늦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정견을 세워 생활하면 마음도 훨씬 편해지고,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도 정견으로 풀면 그 자체가 수행이 됩니다. 또 거기에서 지혜도 계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행한다고 하면 불편하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긍지와 보람과 행복감을 느낍니다.
  《서장》에 “설은 것이 익어 가면 익은 것이 설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설은 것은 우리가 수행하는 것이고, 익어간다는 것은 수행이 점점 익어간다는 말이죠. ‘익은 것이 설어진다’라는 말에서 익은 것은 업장業障을 말합니다. 익었던 업이 설어 없어져 갑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방법대로 살아가면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행복과 보람도 느낄 수 있습니다. 수행은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양변을 여읜 자리가 바로 서방 극락정토다.

  오직 원하건대, 자기 스스로 청정함을 닦아라. 이것이 바로 서방극락이다.
  이 청정淸淨이 백지처럼 깨끗해야 청정이 아니지요. ‘나다-너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양변을 여읜 것이 청정입니다. ‘깨끗하다-더럽다’라고 하는 것처럼 상대적으로 ‘깨끗하다’고 하면 그건 청정이 아닙니다. 청정은 양변을 초월한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상相 없이 보시, 봉사를 하거나, 화두를 들어 일념이 되면 ‘나다-너다’를 초월하는 길이기 때문에 청정합니다. 상대되는 청정은 청정이라는 말에 집착한 것이죠.
  ‘깨끗하다-더럽다’를 초월한 청정 이것이 서방정토입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깨끗하다-더럽다’ ‘나다-너다’ 하는 양변을 여읜 그 자리를 말합니다.
  앞에 “서방西方”에서 보셨지요? 육조 스님이 “서방 극락세계를 보여줄 테니 보겠느냐?” “보여주십시오” 하니까, “바로 봐라” 했지요. 그리고 “바로 본 사람은 의심이 없을 것이니 흩어져라” 했는데 서방정토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듣고 보고 하는 그 마음속에 ‘깨끗하다-더럽다’를 초월하면 그것이 서방 극락세계입니다.
  《미타경》에 “오직 마음이 정토고, 자성이 미타다〔唯心淨土 自性彌陀〕” 하는 자성도 ‘깨끗하다-더럽다’를 초월한 그 자리가 미타고, 오직 그 마음이 양변을 여읜 자리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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