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공덕功德  

  위사군이 예배하고 말하되 “큰스님의 설법은 실로 불가사의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조그마한 의심이 있어 큰스님께 묻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해 말씀해 주소서.”
  육조 스님이 말하되 “의심이 있거든 물어라. 어찌 두 번, 세 번 할 것인가?”
  위사군이 묻기를 “큰스님께서 설하신 법은 서쪽 나라에서 오신 제1조 달마 조사의 종지宗旨가 아닙니까?”
  육조 스님께서 말하기를 “그렇다.”
  위사군이 말하기를 “제자가 듣자오니 달마 대사께서 양 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 무제가 달마 대사께 묻기를, ‘짐이 한평생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렸는데 공덕功德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달마 대사께서 ‘전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시니, 무제는 불쾌하게 여겨 마침내 달마를 나라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하니, 이 말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여 주십시오.”
  육조 스님이 말하되,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 대사의 말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사도邪道에 집착해서 정법을 알지 못한 것이다.”

  달마 스님이 중국에 왔을 때 양 무제가 “나는 평생 동안 절도 짓고 보시도 하고 공양을 했는데 그게 공덕이 됩니까?” 하고 물었는데, 달마 스님이 “공덕이 없다” 그랬는데 “그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의심을 풀어주십시오 했어요.

  육조 스님이 말하되,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 대사의 말을 의심하지 말라.
  달마 스님의 말이 맞으니, 그 말을 의심하지 말라 합니다.

  무제가 사도邪道에 집착해서 정법을 알지 못함이니라.
삿된 도가 뭡니까?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보시하고 절 짓고 공양하는 것은 공덕이 아니다 이거예요. 양 무제가 그렇다는 겁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덕도 더 바라고 복도 더 바라거든요. 그런데 ‘복이 없다’고 하니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없다’는 걸 알고 보시하고 공양할 때 그것이 진정한 복이 된다, 이게 청복淸福입니다. 부처님은 ‘복혜양족福慧兩足’, 복도 혜도 다 갖춘 분이지요. 《금강경》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없이 하는 것이 지혜인 동시에 복이다. 또, 복인 동시에 지혜다. 이게 둘이 아니에요. 그런 분이 부처님입니다. 그런 복은 얼마든지 지어도 좋은데 유아有我로 하는 것은 아무리 복을 지어 봐도 공덕이나 바라고 복이나 바라고 있기 때문에 하면 할수록 잠시 자기 위안은 될지언정 ‘복이다’ 하면 오히려 고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군이 묻기를,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육조 스님께서 말하기를,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짓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 할 수는 없다.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지, 복밭[福田]에 있지 않다.
  자기의 법성에 공덕이 있으니, 성품을 보는 것이 공功이고, 평등하고 곧은 것이 덕德이다.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
  만약 모든 사람을 가볍게 여겨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다.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공덕功德이 곧 가볍지 않다.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공功이 되고,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德이다.
  공덕은 자기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복과 공덕이 다르니,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지, 조사祖師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군이 묻기를,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절도 짓고 보시도 하고 공양도 했는데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왜 공덕이 없을까요?

  육조 스님께서 말하기를,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짓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 할 수는 없다.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지, 복밭[福田]에 있지 않다.
  복밭〔福田〕은 어디고, 법신은 어디입니까? 같은 자리 아닙니까? 똑같은 자리인데 이 법신은 실제로 ‘나다-너다’를 여읜 그 자리를 말하고, 복전은 유위有爲 복전이니까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리를 복전이라 한다. 우리 마음 속에 복전이 따로 있고 법신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같은 자리인데 이름이 다릅니다. 무아無我라고 하는 건 법신이고, 유아有我라고 하는 건 복전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말이 왔다 갔다 하니 잘 봐야 합니다.

  자기의 법성에 공덕이 있으니, 성품을 보는 것이 공功이고, 평등하고 곧은 것이 덕德이다.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
  만약 모든 사람을 가볍게 여겨서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다.
  양무제 같은 사람이지요. 아상을 끊지 못하고 아무리 복을 짓더라도 그건 공덕이 없다. 아상을 없앤 그 자리에서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이렇게 아상이 있는 사람, 공덕이 없는 사람이 하는 보시는 공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법신에도 세탁이 된 것과 안 된 것, 둘로 나눴어요. 이것이 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앞에는 세탁이 된 내가 없는 그 자리에서 봤기 때문에 자성·법성은 공덕이 있습니다, ‘성품 보는 것이 공이고 성품을 봤기 때문에 평등하고 곧은 것이 덕이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뒤에서는 아상을 못 끊어 지혜가 없는 그 자리에서 보면, 공덕이다 복이다 하는 것도 다 허망하고 법신에 공덕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공덕功德이 곧 가볍지 않다.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공功이 되고,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德이다.
  공덕은 자기 몸과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복과 공덕이 다르니,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지, 조사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공덕功德은 자신이 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짓는 게 아니죠. 여기에 복과 공덕이 다르다는 말은 복은 유아有我에서 하는 복이고, 뒤에 공덕은 무아無我에서 하는 공덕입니다.
  그런데 무아에서 하는 복이라면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사실 이 단락이 조금 혼란스러운데 잘 보시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복과 공덕이 다르다’ 하는 것도 무아에서 짓는 복이라면 그 복도 공덕입니다. 다른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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