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돈오頓悟(3)

  선지식아, 내가 홍인 화상 회하에서 한 번 듣고 말끝[言下]에 크게 깨쳐[大悟] 진여본성을 단박에 보았다.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내외가 명철하면, 스스로 본 마음을 알고, 만약 본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반야삼매를 깨달으면 곧 무념이다.
  무념無念이란 무엇인가?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모든 곳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자성은 청정해서 여섯 도적[六賊]으로 하여금 여섯 문[六門]으로 쫓아나가 육진六塵 중에 있더라도 여의지도 아니하고 물들지도 아니해서 오고 가는 데 자유로운 것이다. 이는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 한다.
  온갖 사물[百物]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게 하지 말라. 이것은 곧 법에 묶임[法縛]이니 바로 변견邊見이라 한다.
무념법無念法을 깨친 이는 모든 법을 다 통하며,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 돈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른다.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내외가 명철하면
  우리가 듣고 보고 하는 이 자성의 마음자리가 밖의 것도 실체가 없고 안에도 실체가 없고, 무아고, 공이라고 하는 것을 사무치면,

  스스로 본 마음을 알고, 만약 본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이 본 마음이 뭡니까? 역시 ‘나다-너다’를 초월한 그 자리를 말하지요. 그 자리를 알면 해탈입니다.

미완성 삼매와 완성 삼매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반야삼매를 깨달으면 곧 무념이다.
  우리가 공부해 가는 과정도 삼매라 하지만 공부를 완성해서 확철대오한 경계도 삼매三昧라고 합니다. 이게 진짜 삼매죠. 공부해 가는 삼매는 미완성 삼매에요. 공부를 완성해서 자유 자재하는 평상심으로 배고프면 밥 먹고 고단하면 잠자는 그 자체가 삼매입니다.
  흔히 공부과정만을 삼매라 알고 있는 분이 있는데 그건 미완성 삼매이고, 완성 삼매는 깨달은 후 생활 자체가 삼매에요. 이것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반야삼매라 합니다.

  무념無念이란 무엇인가?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앞에서 편견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선법善法을 보든지 악법惡法을 보든지 어떤 법, 부처님 법을 보든지, 예수교 법을 보든지,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게 무념이에요.
  그래서 기독교도 하나님부처, 불교는 석가부처, 도교는 태극부처, 힌두교는 브라만부처, 이슬람교로 말하면 알라신부처 등 이렇게 모든 것을 부처로 보면 집착하지 않습니다. 끝에 다 부처가 붙으니까, 모든 게 평등하여 차별이 없어요. 이렇게만 되면 이 지구상에 종교전쟁은 없어지겠죠?
  그런데 그 이름, 명사에 집착해서 오직 자기가 믿는 신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악마, 외도로 보니까 죽이고 살리는 전쟁을 하게 됩니다.

  모든 곳에 두루하되 모든 곳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곳에 두루 하여 있으나 집착하지 않아요.

  항상 자성은 청정해서
  항상 자성 그 자리는 청정하다. 청정한 게 뭔가요? ‘나다-너다’를 나눔이 없는 게 청정한 자리입니다.

  여섯 도적[六賊]으로 하여금 여섯 문[六門]으로 쫓아나가 육진六塵 중에 있더라도 여의지도 아니하고 물들지도 아니해서
  여섯 도적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지요. 항상 자성이 깨끗하여 ‘나다-너다’가 없으면 안이비설신의로 하여금 그 문을 쫓아 밖으로 나가는 거지요. 나가서 육진 중에 있더라도 그걸 배제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서 여의지도 아니한다고 하니 ‘그 자리에 물들어 집착하는 게 아니냐?’ 오해할 수도 있지요. 그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작용하되 물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고 가는 데 자유로운 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 한다.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하지요. 당나라 때 앙산仰山 스님이 정읍 스님에게 가서 물었어요.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그러자 “내가 굉장히 쉽게 가르쳐 주겠네” 하시면서 대답했습니다. 육각의 집이 있는데 그 육각마다 창문이 하나씩 있다. 그 집에 원숭이 한 마리가 들어가 있었는데, 남쪽 문에서 원숭아 부르면 원숭이가 남쪽 문을 열고 대답하고, 북쪽 문에 가서 부르면 그 문을 열고 대답한다. 여섯 문마다 다 그렇게 답하는 겁니다.
  여기서 육각집이란 바로 안이비설신의를 말합니다. 그리고 원숭이란 우리 마음입니다. 그 놈이 부르는 대로 문을 열고 대답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불교라고 정읍 스님이 말합니다.
  그러자 앙산 스님이 “그럼 원숭이가 잠잘 때에는 어떻게 됩니까?” 하고 또 물어요. 깊이 잠들면 불러도 안 나오잖아요. 이건 뭘 의미하는 건가요? 양변을 여의었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읍 스님이 법상에 앉았다가 내려와서 손을 잡고는 “우리가 이렇게 만나고 있지 않느냐” 하고 대답합니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여섯 문을 통해 나가서 육진 경계에 섞여 있더라도 그것을 청소한다고 싹 없애버리고 도를 구하는 게 아니라 같이 어울리고 섞여 있더라도 물들지 않아요. 물들지 않으니까 오고 가는데 자유자재한 겁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것이 반야삼매입니다. 또 이것이 자재해탈이다. 이것을 무념행이라 한다.

  온갖 사물〔百物〕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게 하지 말라.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항상 생각을 끊지 말라. 그것을 도道라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온갖 사물도 생각 안 하고 아무 생각 안 일으키고 딱 끊어버리는 것으로 도라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단견斷見에 떨어지는 것이지 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곧 법에 묶임〔法縛〕이니 바로 변견邊見이라 한다.
  한 생각 일으키지 말라고 하니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단견이 되면 곧 ‘없다’는 법에 묶여 버린다는 말입니다. ‘없다’는 법에 구속되는 그것이 변견이다. 한쪽에 치우친 견해다. 중도中道가 못되고 무無에 치우치지 않으면 유有에 치우치고, 유에 치우치지 않으면 무에 치우치는 그런 것을 변견이라 합니다.

  무념법無念法을 깨친 이는 모든 법을 다 통하며,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 돈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른다.
  무념無念이 뭡니까?
  그 경계에 가 있어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자유자재한 사람의 생각이 무념입니다.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