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근기根機(2)


달라이라마 스님의 법문을 최상승법문으로 받아들여선 안된다.

  실제로 우리는 외국 스님들보다 법을 훨씬 깊이 보면서 존경도 못 받고 신뢰도 못 받고 있거든요.
  < 달라이라마의 행복론> 같은 책을 몇 페이지 읽어보면 출가하여 처음 강원에 다닐 때 인천교人天敎라고 배우는데 그 인천교는 인과, 즉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가르치는 공부 수준입니다. 거기에서 아함, 방등, 반야 이렇게 해서 조금씩 공부의 단계를 높여가지요.
  그렇듯이 그 분이 얘기한 걸 보면 공도리空道理나 다른 불교의 깊이를 몰라서 그런 건 아니고 중생의 근기에 맞춰 말하는 내용은 사실 인천교를 별로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 분 실력이 그것 밖에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중생 근기에 맞춰 하는 내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전체 불교이고, 최상승법을 설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됩니다. 간혹 사람들이 달라이라마 얘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법문이 높은 법문도 있고 낮은 법문도 있는데, 그 법문은 인과 법문, 선인선과 악인악과 하는 그런 법문이니 우리는 그것을 최상승 법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천교人天敎에서 최상승으로 가려면 선악을 초월한 그 자리에서 절대 선善으로 매일 매일 선善이 되는 그런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최상승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을 가지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반야삼매에 들어간다.
  오조 홍인 스님 때부터 <금강경>을 굉장히 중요시 했어요. 그런데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해서 일체 경전을 다 무시하는데, 당시 이 분들이 법을 보는 안목이 지금보다 못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훨씬 깊이 보는데도 불구하고 <금강경>을 굉장히 중시했어요. 이 <금강반야바라밀경>도 마음에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 봐도 좋습니다. 물론 이것은 내 견해입니다.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금강반야바라밀경>입니다.

  이런 사람의 공덕이 무량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경에서 분명히 찬탄하였으니 능히 다 설명하지 않겠다.
  <금강경> 가운데 갠지스강 모래수 하고 비교해서 찬탄하는 그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최상승법이니, 큰 지혜와 상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근기와 지혜가 작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을 내지 않으니
  근기가 약한 분은 신심을 안 냅니다. 뒤에 이유가 나오니 설명은 생략합니다.

  무엇 때문인가? 비유하면, 마치 큰 용이 큰 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옛날에는 용이 비를 내린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이 말이 통합니다. 요즘은 안 통하지요. 당시는 이 말이 통하기 때문에 썼어요. 그렇게 아셔요.

  염부제閻浮提에 비가 내리면 풀잎이 떠다니는 것과 같고
우리 사바세계에 비가 오면 풀잎이 힘이 없으니까 둥둥 떠다니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근기 약한 사람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믿지 않고 신심도 안 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근기가 높은 사람은 어떤가?

  만약, 큰 바다에 비가 내리면 더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다.
이와 같이 큰 바다가 받아들이듯이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대승의 사람이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치고 안다. 그러므로 본성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어 스스로 지혜로 비추어 보아 문자를 빌리지 않음을 알라.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듣고 깨달은 사람은 우리가 지금 듣고 보고 하는 이 반야 지혜가 본래 갖춰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본래 갖춰진 그 반야 지혜로 보고 비추어 이런 문자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 문자를 보고 우리가 이리저리 분별하는 게 아니고 본 성품에 반야 지혜가 갖추어져 있어 그 지혜로 비추어 보아 문자를 통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
이것도 역시 현대 과학으로 보면 안 맞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통했으니까 우리는 그냥 그렇게 보는 겁니다.

  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 가운데서 이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초목과 유정ㆍ무정을 다 윤택케 하고,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큰 바다에 들어가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으로 합쳐지는 것과 같으니,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능히 바다와 강의 물을 이끌어 와서 모든 중생 초목에게 골고루 비를 내리게 해서 그 내린 비가 수천, 수만 갈래로 개울이 되어 흘러가는데 그 흘러가는 개울물이 전부 바다로 들어가면 하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 법으로 보면 안풀리는 게 없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다양하게 형상 지어져 있지만 그 본성 그 자리에서 보면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줄 알면 비교를 안 해요. 그런 줄 모르고 형상만 보고 차이가 있으니까,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자꾸 차별을 하는데 본성을 보게 되면 조금도 차별이 없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갈등과 대립과 투쟁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형상만 보고 비교하기 때문에 끝없이 갈등하고 대립하고 투쟁합니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닙니다. 주의주장도 그렇고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이 지구상에 가장 심하게 갈등하는 게 종교입니다. 기독교다, 불교다, 회교다 해가지고 불교는 그 중에 빠져 있지만, 힌두교까지 세 종교가 지구상에서 하루도 그칠 날 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 원리를 모르고 차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인줄 알면 석가 부처, 예수 부처, 하나님 부처, 힌두 부처, 알라 부처, 브라만 부처 그렇게 알면 싸울 일이 없어요. 다 부처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안 보고 예수교, 이슬람교, 힌두교 모두 창조신이라는 근본 자리에 대하여 차별되게 보고 따로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서로 우열시비해서 전쟁하고 갈등하는 겁니다. 그걸 축소시켜 놓으면 사람도 똑같습니다. 내가 잘 났니, 너가 잘 났니 매일 싸웁니다. 내 생각이 옳고, 너 생각은 나쁘고, 남을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 교단 문제든, 이 세계 문제든, 부처님 법으로 풀면 안 풀리는 게 없습니다. 가정 문제, 사회 문제, 국가 문제, 국제 문제 등 무슨 문제든 이 불교로 안 풀리는 게 없어요.
  그래서 가정주부를 만나면 가정 살림 잘 해라, 기업하는 사람을 만나면 회사 잘 해라, 정치하는 사람을 만나면 정치 잘 해라,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얘기해줄 수 있습니다. 차별이 없고 다 평등하다는 걸 알면 그런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상대편 입장을 이해해주면서 바른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좁은 소견으로 나는 이렇게 이해하는데 저 사람은 이해를 안 해 주니 섭섭하구나. 하지요? 상대편이 이해를 해 주든 안 해 주든 상관없습니다. 나만 이해하면 돼요. 그러다 보면 차차 상대편도 이해를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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