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반야般若(1)
   
  무엇을 반야般若라 하는가?
  반야는 지혜다. 언제나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이 곧 반야행이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어지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난다. 마음 가운데에 항상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나는 닦는다’고 말한다.
  반야는 형상이 없으니, 지혜의 성품(智慧性)이 바로 그것이니라.

  바라밀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인도의 산스크리스트어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말이다. 바라밀이라는 뜻을 알면 생멸生滅을 여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 물에 파도가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곧 이 언덕이다.
  경계를 여의면, 생멸이 없어 물이 항상 끝없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곧 이름하여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이름한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실천한다.
  마땅히 생각할 때 망상(妄)이 있으면, 그 있는 망상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 생각마다 만약 행하면 곧 진실이 있다고 말한다.
  이 법을 깨달은 이는 반야법般若法을 깨친 것이며, 또 반야행般若行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 생각(一念)으로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다.

  선지식아, 곧 번뇌가 지혜(菩提)이니, 앞생각(前念)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이고, 뒷생각(後念)에 깨달으면 곧 부처다.
  선지식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귀중한 것이고, 가장 높은 것이며,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에서 나와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러 오온五蘊의 번뇌와 진로塵勞를 타파하는 것이니, 가장 귀중하고 가장 높으며 제일이다.
  가장 높다(最上)고 찬탄하여 최상승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부처를 이루어 가는 것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오고 가는 것도 없나니, 이 정定과 혜慧가 같아 일체법에 물들지 않는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에서 삼독三毒을 변하여 계정혜戒定慧로 삼았다.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 사천 지혜를 쫓으니, 어째서 그런가?
  세상에 팔만사천 진로塵勞가 있기 때문이니,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이 법을 깨달은 자는 곧 무념無念이다. 기억하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어서 속이고 거짓됨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이다.
  지혜로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룬다.”

  무엇을 반야般若라 하는가?
반야는 지혜다. 언제나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이 곧 반야행이다.
  반야는 지혜입니다. 이 반야 지혜는 ‘나다-너다’는 양변을 초월한 자리를 말합니다. 반대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죠. 그래서 생각 생각이 나다-너다를 초월한 자리가 되어 항상 지혜를 쓰는 것이 곧 반야행입니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어지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난다. 마음 가운데에 항상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나는 닦는다’고 말한다.

  한 생각이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반야가 끊어지고, 내가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라고 하는 걸 알면 반야가 생겨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이 아무리 도를 닦는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닦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 가운데 항상 무아無我가 되고, 공이 되고, 실체가 없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봉사도 해야 그것이 진짜 닦는 것입니다.
  여기 “마음 가운데 항상 어리석으면서” 할 때 이 어리석은 게 뭡니까? ‘나다-너다’, ‘있다-없다’ 여기에 집착하면서 또 ‘도를 닦는다’고 매일 말하는 거예요.
  사실 지금 한국불교의 어느 수행단체든지 이게 문제입니다. 선방 주변도 예외가 아니에요. 이것이 극복 안 되면 한국불교가 힘들어질 겁니다. 정말로 어려운 문제 같아요.
  그런데, 육조 스님 당시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마음 가운데 항상 어리석으면서 수행한다는 거예요.

  반야는 형상이 없으니 지혜의 성품(智慧性)이 바로 그것이니라.

  이 반야는 형상이 없습니다. 형상이 없기 때문에 지혜의 성품이 바로 반야입니다. 지혜의 성품(智慧性)이 무엇이냐?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성自性이라 하고, 전체를 말할 때는 법성法性이라고 하는 그 자리입니다. 거기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습니다. 또 반야도 없고 번뇌도 없습니다. 그것을 초월한 것이 반야입니다. 또한 이 반야가 누구는 있고, 누구는 없는 게 아니라 모든 존재에 보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반야가 개발이 되어 그렇게 마음을 쓰고(用心)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왜 그러느냐?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그 착각으로 인하여 그런 것이니, 사람이 나쁜 건은 아닙니다. 그 착각만 깨면 형상이 없는 그 반야를 지혜의 성품(智慧性)이라 하는데 그것을 보게 되면 그놈이 세탁기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있다’고 하는 것도 세탁해 버리고, ‘없다’고 하는 것도 세탁해 버리고, 부처님이 오더라도 세탁해 버리고, 중생이 오더라도 세탁해 버리는 그런 세탁기 역할을 해요. 세탁해서 보니까 잘 보이는 거예요. 안경도 뭐가 묻으면 잘 안보이잖아요. 그렇게 세탁해서 보면, 보는 것마다 행복하고, 느끼는 것마다 행복하게 느끼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마음이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고, 본래 우리가 그렇게 되어 있고 지혜의 성품이 그것이라는 겁니다.

‘바라밀’이란 무엇인가?

  바라밀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인도의 산스크리스트어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말이다. 바라밀이라는 뜻을 알면 생멸生滅을 여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 물에 파도가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곧 이 언덕이다.
  이건 착각의 세계입니다. 본래 나의 존재 원리는 생멸을 여읜 그 자리입니다. ‘바라밀’이라는 말은 ‘저 언덕에 이른다’인데, 한자로는 ‘到彼岸도피안’입니다. 이 뜻을 알면 나고 죽음(生滅)을 여윕니다. 경계에 집착하여 ‘있다-없다’, ‘좋다-나쁘다’에 집착하면 거기에서 비교하는 마음이 나오니까 자연히 나고 죽음(生滅)이 일어나지요.
  이건 뭐와 같은가? 물에 파도가 치는 것과 같다. 곧 이것이 이 언덕(此岸)이요. 경계를 여의면, 그건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니까, 집착도 안 하지요.

  경계를 여의면, 생멸이 없어 물이 항상 끝없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곧 이름하여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이름한다.
  생멸이 있는 것은 ‘이 언덕(此岸)’이라 하고, 또 생멸이 없고, 경계를 여읜 것을 물이 끝없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 끝없이 흘러가는 물이라도 그냥 흘러가는 형상만 보면 ‘저 언덕(彼岸)’이 안 됩니다.
  파도가 이는 물이든, 잔잔하게 흘러가는 물이든, 습기濕氣가 그 물의 성품임을 알면 물의 존재 원리를 다 아는 겁니다. 파도가 흐르든,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든 그 물의 성품이 뭐겠습니까? 습기입니다. 흙탕물도 습기가 있고, 또 맑은 물도 습기가 있고, 또 파도치는 물에도 습기가 있고, 잔잔히 머물러 있는 물도 습기가 있거든요. 그 습기를 우리가 알게 되면, 흙탕물도 물이고, 깨끗한 물도 물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거기에 맞게 우리가 쓸 수 있는 지혜가 나옵니다. 그것을 ‘저 언덕에 이른다(到彼岸)’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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