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삼신三身(2)


연기이기 때문에 ‘내가 없다(無我)’


  그러니 실제 해보면 굉장히 어려운데 말로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내가 없는 줄 알면 됩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내가 없어요.

CTL 私見 불은 있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한 불은 머무른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하니 실체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일체가 공空하다. 또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머무르면서 머무르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면서 머무르는 것이니 일체에 걸리는 것이 없다. 자유자재하다.
  이 만 가지 법이 모두 자기 성품에서 나오니까 자성自性에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서 우주 삼라만상 전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법성法性이라 하고, 개개인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은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그래서 일체 유심조할 때 그 마음은 바로 법성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한 것을 행하고, 모든 선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선행을 닦는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자성 속에 있어 자성은 항상 청정함을 알라.
  진주 보배가 진흙 속에 천년, 만년 있더라도 진흙만 닦으면 보배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자리는 절대로 물드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보게 되면 우리는 천년, 만년의 악이 일순간에 없어집니다. 진주의 진흙만 닦아내면 그대로 가치를 발합니다.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보지 못한다, 홀연히 지혜의 바람(慧風)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모두 일시에 나타난다.

  “지혜의 바람이 불어 걷는다.” 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어렵지요. 별 소리 아닙니다. ‘나다-너다’ ‘있다-없다’를 초월하면 지혜 바람이 부는 거예요. ‘있다-없다’ ‘나다-너다’에 집착하는 게 구름이 덮힌 것입니다. 그것이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다, 공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 바람이 불어 구름을 확 걷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간단합니다. 이해하기 쉽습니다.
  모든 우주 만물은 연기로 존재합니다. “만물이 연기로 존재하니 실체가 없고 그래서 공空이다.” 하는 것을 알면, 지혜의 바람으로 검은 구름을 확 걷어 해와 달이 밝고 밝아 삼라만상이 일시에 드러납니다.

  세상 사람의 성품이 깨끗한 것이 맑은 하늘과 같아 혜慧는 해와 같고, 또 지智는 달과 같다.
  여기에서 세상사람, 즉, 모든 사람ㆍ존재, 그것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또 무정물無情物이든 유정물有情物이든, 성품이 깨끗한 것은 다 똑같습니다. “오온이 개공”이라고 했어요. 성품이 깨끗한 것이 마치 무엇과 같느냐? 맑은 하늘과 같습니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상의 뜬구름이 덮여 자기 성품이 밝지 못할 뿐이다.
  지혜는 항상 밝아 있습니다만, 우리는 바깥 경계에 집착해요. 있다-없다는 경계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면 절대로 이런 일은 안 일어나지요. 바깥 경계에 있다-없다 집착하니, 망념 뜬구름이 밝은 자성自性을 가려 빛이 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법(眞法)을 열어 미망迷妄을 불어 물리치면 안팎이 사무치게 밝아(內外明徹) 자기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 모든 법이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한다.
  “선지식이 참법을 열어” 했는데, 이 참법(眞法)이 뭘까요? 내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실체가 없다” 여기에 모든 핵심이 있어요. 이 말을 지혜의 바람이다, 진법이다, 계속 바꿔서 얘기하고 있는데 결국 같은 말입니다. “연기고 실체가 없다” 이렇게 알면 참법을 여는 거고 지혜의 바람이 부는 거예요. 참법을 열어 미혹하고 허망(迷妄)한 것을 불어 없애면 안팎으로 밝아져 주관, 객관이 전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일체가 다 실체가 없고 공입니다.

  스스로 귀의歸依한다 함은 무엇인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귀의한다고 함이다.
  선하지 않은 행(不善行)을 없애는 것이 이름하여 귀의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한테 귀의한다, 화신불에게 귀의한다, 보신불에게 귀의한다, 하면 부처님한테 의지하는 것 같지만, 그 귀의한다는 말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성 청정심을 보아 절대 선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자성 청정심을 못 보았을 때는 선도 할 수 있고 악도 할 수 있고, 또 선하다 악도 하고, 이렇게 번갈아 가며 하는데, 자성 청정심을 깨닫게 되면 악한 생각을 안 일으킵니다. 절대 선으로 갑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좋은 날이에요.
  이것이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선하지 않은 일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니 “귀의불歸依佛 양족존兩足尊”하는 것이 부처님에게 의지해 가겠다는 그런 귀의가 아니고, 각자 마음속에 자성 청정한 자리를 보아 다시는 선악이 반복되는 일을 안 하는 것이 귀의하는 겁니다. 귀의는 부처님께 의지하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선악을 초월해서 자성 청정심을 보는 그 자체가 귀의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불교 공부를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

  육조 스님은 이걸 전부 마음으로 해석하고 연기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이다, 실체가 없다, 연기다, 중도다, 이런 말 한마디도 없지요. 그런 말이 없어도 선적禪的으로 표현하면서 연기 중도에 벗어나지 않아요. 그대로예요.
  그래서 불교의 핵심은 바로 연기 중도라 하는 겁니다. 많은 것을 보면서 그 핵심을 이해하는 것보다 먼저 핵심을 이해를 하고 많은 것을 보는 것이 훨씬 빠른 공부입니다. 그러면 “아, 맞아! 그 소리도 이 소리고, 이 소리도 그 소리구나! 『금강경』도 이 소리고, 『법화경』도 이 소리이고 전부 이 소리구나!” 이렇게 보는 것이 빠릅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보고 그때마다 각기 결론 내리면서 모두 종합해서 그때 그 많은 소리가 중도 연기였구나! 이렇게 보는 것도 좋지만, 중도 연기를 먼저 이해해서 각론인 경전으로 들어가면, 이것도 중도 연기 이야기, 저것도 중도 연기 이야기 이렇게 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게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중도 연기를 계속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시면 아, 이 얘기도 중도 연기, 이 얘기도 중도 연기, 굳이 중도 연기란 말을 안 써도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그 정도가 되면 원효 스님 같이 회통불교會通佛敎를 하는 거예요.
  『금강경』 따로 『법화경』 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염주알 꿰는 것처럼 확 꿰버리는 거예요. 이론적으로 회통한 사람을 예전에는 경안經眼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걸 보면서 중도 연기를 먼저 이해하고 모든 것을 회통하는 그런 자세로 불교를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빠릅니다. 여러 가지를 보고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시간적으로도 빠르고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코끼리 비유를 합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고 얘기하면 모자이크해서 맞추듯이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전체를 먼저 본 사람은 장님이 와서 ‘코끼리가 기둥 같이 생겼다’고 하면 ‘너는 다리를 만졌구나’, 코끼리가 ‘새끼처럼 생겼다’고 하면 ‘너는 코를 만져봤구나’, 코끼리가 ‘빗자루 같이 생겼다’고 하면 ‘꼬리를 만져봤구나’ 이렇게 다 알 수가 있지요. 전체를 먼저 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천백억 화신불이란 무엇인가?

  생각(思量)하지 않으면 성품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하여 지옥이 되고, 선한 법을 생각하면 변하여 천당이 되며, 독과 해침(害)은 변하여 축생畜生이 되고, 자비는 변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하여 윗세계(上界)가 되고, 또 어리석음은 변해서 하방下方이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은바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 못한다.
  한 생각이 선하면 지혜가 생하니, 이것을 자성화신自性化身이라 한다.

  원만한 보신불이란 무엇인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는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선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 한다.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선함을 물리쳐 그치고, 한 생각의 선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없앤다.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선함을 보신報身이라 한다.

  법신을 쫓아 생각함이 곧 화신이고, 생각 생각이 선한 것이 보신이다.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는 것을 곧 귀의라 한다.
  가죽과 살은 색신이며 집이라 귀의할 곳이 아니다. 다만, 세 몸을 깨치면 곧 대의를 아는 것이다.

  천백억 화신불이란 무엇인가?
생각(思量)하지 않으면 성품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생각하면 곧 스스로 변화한다.
  청정 법신불 다음에 화신불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작용하지 않아 공적영지空寂靈智(적적성성)해 있습니다. 이게 자성이고 법성이에요. 여기에서 생각을 일으키면 화신化身으로 변합니다. 그럼 화신하고 법신하고 둘이 아니라 법신法身이 화신化身으로 변하면서 영지공적靈智空寂(성성적적)하는 겁니다.
  스스로 작용하기 시작하면 변하기 시작해요. 지금 우리는 작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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