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무념無念(1)

“선지식아! 법에는 돈점頓漸이 없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둔함이 있다. 미혹한 사람은 점점 계합하고, 깨달은 사람은 단박에 닦느니라. 스스로 본 마음(本心)을 아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본래 차별이 없지만, 깨닫지 못하면 긴 세월동안 윤회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지식아!”는 육조 스님이 우리에게 하는 소리입니다.

  “선지식아 법에는 돈점이 없되”

  여기에 돈頓ㆍ점漸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돈점은 육조 스님 당시의 그것과는 내용이 다릅니다. 중국에서 돈점은 육조와 신수 스님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방법도 갈라집니다.
  우리나라 돈점은 육조 스님 이하 남악 회향(677~744)으로부터 마조(709~788) - 백장(749~814) 등으로 내려오는 그 계통을 다 각각 인정합니다. 돈오돈수하는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돈오점수하는 분도 그 법맥에 줄을 대고 있으니 사실 우리는 뿌리가 같아요.
  그래서 간혹 이런저런 자리에서 그런 시비가 일게 되면, 보조 스님 이후에 자꾸 돈점 얘기가 나오는데 그 시점에서 가지를 잘라버리자. 조상은 하나다. 이걸 인정하고 큰 집, 작은 집 정도로 보자. 육조 스님과 신수 스님이 갈린 것과 우리는 다르니 시비하지 말자! 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돈점은 중국과는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조상이 하나입니다. 돈오의 기준이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과연 조사선의 돈오기준이 어느 것이 맞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법에는 돈ㆍ점이 없다法無頓漸

  여기에서 법法이라는 것은 자주 비유하는 “손가락과 달”로 말한다면 달입니다. 우리의 존재원리, 본래 부처 자리에는 돈점이 없어요. 점수, 돈수가 없습니다. 없는데 사람이 영리하고 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 영리하고 둔한 것이 있다고 하지만, 뒤에 나오지요. 아무리 둔한 하근기라도 최상승 법문을 들어 믿고 공부하면 최상승 근기다. 사람의 근기에 상근기, 하근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하면 다 상근기입니다. 육조 스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영리하고 둔한 것을 가려 영리한 것은 상근기이고 둔한 것은 하근기인데, 실제 여기에 공부하는 과정은 손가락이잖아요. 손가락인 방편에는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법, 즉 우리 존재원리에는 돈점이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우리나 손톱만큼도 다르지 않아요. 똑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존재원리를 바로 못 보고,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그 효능이 안 나오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고단하면 잠자는 기능은 우리나 도인이나 똑같아요.
  부처님과 같은 효능이 안 나오는 차이인데, 효능은 왜 안 나오느냐? 그것은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착각만 깨면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꿈 깬 것과 비교를 많이 하는데, 꿈 깨면 꿈속에서 했던 일 다 허망하잖아요?

공을 알면, 태양 같은 지혜가 나온다

  그러므로 법에는 돈점이 없습니다. 법에는 돈점만 없을 뿐 아니라 종교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연기緣起 현상으로 보면 불교다. 또, 공자나 인도 브라만이나 모든 것을 연기 현상으로 보면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전부 연기라고 합니다.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로 존재한다. 연기로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공이다.”

  그러면, 공이라 해서 허망하고, 허무하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냐?
  아닙니다.
  공인 줄 알면, 먹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짱짱 납니다. 즉, 공을 모르고 집착했을 때는 남하고 비교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이런 저런 분별심의 먹구름 때문에 괴로움에 빠집니다. 하지만,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동시에 스트레스가 사라지면서 모든 것을 평등으로 보는 눈이 생기고, 또 어떤 차별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태양과 같은 지혜가 나온다는 거예요. 공이라고 허망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그런 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교의 공을 가장 이해 못하는 게 바로 이 점입니다. 공이라고 하니까 양극단의 공인 줄 알고, 있다-없다의 공인 줄 알고, “허무지교虛無之敎다” “비관悲觀하는 종교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불교가 말하는 “공空”은 그런 게 아니지요.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타나는 그런 공입니다. 우리가 비교하면서 이런 저런 스트레스 받고 자기 학대했던 그 자리가 공인 줄 알면, 그것은 사라지고 거기에 아주 태양과 같은 지혜가 나옵니다.
  그 지혜가 우리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편안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떤 차별경계 역경계ㆍ순경계, 역기능ㆍ순기능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우리는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의 본질은 평화와 자유입니다. 우리 본래 그 자리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법에는 돈점이 없다는 말은 돈점 뿐 아니라 종교도 없고, 남녀도 없고, 귀천도 없고, 지위고하도 없고, 일체가 없는 자리이면서 일체가 활발하게 살아있는 자리입니다.

깨치지 못하더라도 정견은 갖추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자리가 우리 존재원리입니다. 우리 존재원리가 만들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모두 보고 듣고 생각하지요. 바로 그거예요. 그게 돈점이 없는 자리에요. 이거 하나만 알면 사실은 불교를 다 이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는데, 문자만 세우지 않는 자리가 아니라 돈ㆍ점도 세우지 않고, 부처다-중생이다, 해탈이다-구속이다, 지혜다-번뇌다, 이런 대립하는 양변을 모두 세우지 않고 다 여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걸 못 벗어나느냐? 우리는 대개 현상만 보고 평가하고 비교하고 그럽니다. 겉 현상 말고 그 알맹이 본질, 이것만 보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없다는 그 자리만 이해하면 이 세계에 전쟁도 안 하게 됩니다. 심지어 경찰서나 형무소가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자리예요. 그런데 인류역사가 몇 천 년이 내려오면서 계속 갈등하고 대립하고 투쟁하면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전부다 해소해줄 수 있는 그런 위대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게 만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 원리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것을 보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귀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돌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되고, 수행해야 되고, 출가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누구든지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 자리를 보아 영원히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끝없이 정진해 나가야 합니다. 꼭 참선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이걸 목표로 하고 살아가면 중간과정도 겪을 수 있고 구경도 갈 수 있는 거지요.
  그런 점에 대하여 <육조단경>을 보면서 깨달으면 좋고, 못 깨닫더라도 정견 정도는 갖추고 살자. 그러면 무슨 일을 하든지 보람을 느끼면서 정말로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게 안 되면 나이가 들어 병들고 아프면 정말 후회도 하고 한도 많이 남기게 될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정견 정도는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단박에 닦는다

  “미혹한 사람은 점점 계합하고, 깨달은 사람은 단박에 닦느니라. 스스로 본 마음(本心)을 아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미혹해 있으면 점차 계합합니다. 혜능 스님은 단박에 깨닫는 것을 주장했지만, 이와 같이 점진적으로 깨닫는 말도 하십니다. 그렇지만, 깨달은 사람은 꿈 깬 것과 같으니, 깨달아 꿈을 깨면 닦을 게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단박에 닦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식심견성識心見性이라고 하는데 본 마음(本心)을 알면 본래 성품(本性)을 봅니다. 이 본 마음은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작용하는 이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본성품을 보고 견성한다는 것은 보고 듣고 작용하는 것을 일으키는 바로 자리를 보는 것이니까 이게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일으키는 자리와 일어나는 작용이 하나입니다. 아까 법에는 돈점이 없다는 그 자리와도 같은 자리입니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하지요? 그 보고 듣고 하는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느냐? 이것을 보는 것이 견성見性입니다. 그러니까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깨달은 자리는 차별 없이 평등하다

  “깨닫고 나면 본래 차별이 없지만,”

  우리가 깨닫고 나면 거기에는 부처-중생, 빈-부, 귀-천, 높다-낮다, 이런 게 다 없어져요. 영리하고 둔한 것도 없어요. 거기에는 남자-여자, 하나님-부처님도 다 없어져요. 그래서 굉장히 편안해지고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껍데기만 볼 때는 많이 가졌다, 적게 가졌다. 귀하다, 천하다. 이런 차별을 다 하거든요. 그런데 성품만 보면 그런 차별이 없어져요.

  우리는 일상에서 차별하면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지요? 남편도 차별하고 아내도 차별하고 그래서 서로서로 상처를 주면서 살아요.
  이 성품 자리를 보게 되면 전부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시에 자기가 주지를 하든지, 원주를 살든지, 포교를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걸 비교하는 마음이 없어져요. 그래서 자기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가치와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 부러워할 것이 없게 됩니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하면 그 분야의 대가, 즉 전문가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남이 인정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 자기를 인정하고 살게 되거든요.

  그래서 성품을 보게 되면 차별이 없어져요. 본래 그 자리는 평등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긴 세월동안 윤회하는 것이다.”
  죽어 윤회輪廻하는 것도 윤회지만, 이 생에서도 계속 윤회를 합니다. 이 일 하다 저 일 하고, 또 이 순간에도 이 생각하다 저 생각을 하는 그런 게 다 윤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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