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정定·혜慧(3)
 
  “일행삼매一行三昧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유마경>에 ‘곧은 마음이 도량이고 곧은 마음이 정토다’라고 하였다.
   마음으로 아첨하고 비뚤어지게 행하고, 입으로는 법이 곧음을 말하지 말라. 다만, 곧은 마음으로 행하며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 한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얽매여 앉아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곧은 마음이라 생각하며, 또 망상을 없애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으로 오히려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될 것이다.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어찌 머물러 있을까?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고,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되는 것이다.
   만약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면, 유마힐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리불을 꾸짖었음은 합당치 않은 것이리라.
   선지식아!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마음을 보고 깨끗한 것을 보며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쳐 이것으로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집착해서 착각함이 수백 가지이니, 도를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선지식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다.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다. 등불이 이 빛의 몸(體)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用)이다. 비록 이름은 두 개가 있으나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ㆍ혜의 법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일행삼매一行三昧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곧은 마음(直心)은 무엇이냐? 곧은 마음이 바로 ‘깨끗한 마음, 조용한 마음’이라고 하는 “양변을 여읜 자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양변을 여읜 자리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조용함(行住坐臥 語默動靜)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행하는 사람을 일행삼매에 든 사람이라 합니다. 이 곧은 마음도 역시 양변을 여읜 자리로 이해하면 됩니다.

“<유마경>에 ‘곧은 마음이 도량이고 곧은 마음이 정토다’라 하였다.”
   곧은 마음이 도량이라 하니까, 마당이나 운동장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마음입니다. 곧은 마음이 우리의 본래 모습입니다. 우리 마음은 곧은 마음입니다. 이 곧은 마음은 ‘나다-너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를 여읜 것입니다. 그래서 곧은 마음이 이 도량이고, 곧은 마음이 이 정토淨土입니다.
   반대로 ‘나다-너다’ ‘좋다-나쁘다’가 있으면 도량도 되지 못하고 정토도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지옥입니다.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마음, 정토 이런 것은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정토淨土라 하고, 연기이기 때문에 도량이라 하고 연기이기 때문에 전부 우리가 만든 게 아니고 본래 우리가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아첨하고 비뚤어지게 행하고, 입으로는 법이 곧음을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마음으로는 아부하고 곧게 못하고 비뚤어지게 행하면서 입으로는 법이 곧은 것을 말하는 사람은 양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양변을 여읜 사람이라면 마음으로 아부하거나 비뚤게 하지 않고, 곧게 행하고 입으로도 곧게 말할 것입니다. 그 곧음은 무엇이냐? 양변을 여읜 것입니다. 전부 같은 말입니다.
   곧은 마음이 도량이고 정토인 줄 알면 언행일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이것 하나 얘기하는 거예요. 이것 말고는 다른 얘기가 없어요.

   다시 정리하자면,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고 곧은 마음을 행하지 아니하면, 입으로는 양변을 여읜 얘기를 하면서 마음으로는 ‘나다-너다’ ‘있다-없다’ 항상 시비하고 있으면 그것은 부처님 제자가 아니며, 언행일치가 안 된 사람입니다. 도인은 멀리서 보면 도인이고, 가까이 보면 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바로 그 말입니다.

다만 곧은 마음으로 행하며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 한다.
   우리가 양변을 여의어 모든 법에 행하게 되면 집착심이 없어져요. 거기에는 ‘나다-너다’가 없는데 뭘 집착할 것입니까? ‘부처-중생’이 없는데 무슨 ‘공부한다, 증득한다, 깨닫는다’가 왜 필요할까요?
   부처님도 그랬어요. 깨닫기 전에 당신도 뭔가 깨닫는 것이 있는 줄 알았대요. 그런데 당신이 깨닫고 보니까 깨달을 것도 없고, 얻어지는 것도 없더라는 겁니다. 이미 다 완성되어 있더라는 거죠. 우리는 그런 위대한 존재입니다. 위대한 존재인데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자기를 끝없이 학대하고 무시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억울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존재원리를 모르니까,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이 <단경>을 읽는 분들도 자기 위대성을 깊이 인식하고 지금껏 그렇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억울한 생각을 내시면 좋겠습니다.
   이 곧은 마음을 알게 되면 집착을 안 해요. 왜냐하면 내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에 대한 집착은 물론이고 법에 대한 집착도 않게 됩니다. 우리 존재원리는 무주無住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얽매여 앉아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곧은 마음이라 생각하며, 또 망상을 없애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으로 오히려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될 것이다.”

   달마 스님이 그랬지요. “밖으로 인연을 쉬고(外息諸緣) 안으로 헐떡거림을 쉬어서(內心無喘) 마음을 담벼락 같이 하면(心如障壁) 도에 들어갈 수 있다.” 마음이 담벼락 같이 되면 도에 들어간다 하니까 담벼락 같이 되려고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망상을 없애서 마음도 일으키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는 이것이 적적寂寂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게 도라 오해합니다.
예를 하나 들지요. 파자소암婆子燒庵 화두가 있는데요.
   어느 노파가 수좌를 암자에 모시고 20년 동안 밥을 해줬어요. 그런데 노파가 아무리 봐도 스님 공부에 진척이 없어요.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 자기 딸한테 “아침에 밥 가져다주고 돌아올 때에 스님 무릎에 가서 앉아서 이럴 때 경계가 어떤지 물어 보거라. 그래서 답하는 대로 와서 얘기해다오.” 딸이 가서 엄마가 시킨 대로 무릎에 앉은 겁니다. 그 스님한테 “이럴 때 경계가 어떻습니까?” 하니까, “찬 바위에 고목이 의지한 것과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 얘기를 듣고 그 스님을 쫓아내고 암자에 불을 질러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적적 공부가 바로 그 스님이 한 그 공부입니다. 일행삼매를 적적만 하는 공부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어찌 머물러 있을까?”
   도는 막히면 안 된다, 통하고 흘러가야 된다. 여기에 이렇게 얘기했는데, 덕이본 <단경>에는 “정과 혜가 하나가 되었더라도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한두 줄 내려가면, “혜와 정이 하나가 되어서 통유를 해야 된다.” 이런 말이 나오죠. 이건 내용이 조금 다른데 같은 소리입니다.
   그러면 통하여 흐르는 것(通流)이 무엇이냐?
   저는 한 20여 년 전에 <육조단경>의 이 대목을 보면서 ‘백척간두 진일보’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어요. 아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백척간두 진일보’할 때 백척百尺이란, 요즘 길이로 33미터죠. 법주사 부처님도 백척이고, 동화사 부처님도 백척입니다. 이 백척이란 말에 굉장히 깊은 의미가 있어요. 백척간두가 33미터 되는 장대 위의 공간을 얘기하는데 그 공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서장>에서는 “한 털 머리 위에서 백천묘의百千妙義가 나온다” 해요.
   그럼, 백척간두는 뭘 의미하느냐?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상이 설명이 됩니다. 이것은 내가 얘기하고 싶지만, 얘기할 수 없습니다. 백척간두는 아까 계속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여기에도 정과 혜가 하나된 그 자리에서 통하여 흘러야 한다. 그래서 선문禪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임마야恁磨也 임마야恁磨也 하면 불임마야不恁磨也 불임마야不恁磨也 하고, 불임마야不恁磨也 불임마야不恁磨也 하면 임마야恁磨也 임마야恁磨也 한다.”
   앞에서 생사生死 얘기를 했는데 양변을 여읜 자리가 ‘일어났다-꺼졌다, 일어났다-꺼졌다’를 활발하게 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서 정말 무애자재하게 활발발 작용하며 통하고 흘러야 됩니다. 통하여 흐르지 않으면, 아무리 정혜가 하나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막혀 있으면 그것은 도가 아닙니다.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고,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되는 것이다.”
   마음이 어디든지 머물지 아니하고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니, 머물면 어떻게 되는가? 구속됩니다, 속박됩니다.
   앞에서 동남아 불교는 수행 방편에다 자기 인생을 끼워 맞추어 박제가 된다고 말했지요. 박제가 무엇입니까? 짐승을 말려서 모양한 것을 박제라고 하잖아요. 박제가 된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고 속박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면, 유마힐이 숲 속에서 편안히 앉아 있는 사리불을 꾸짖었음은 합당치 않은 것이리라.”
   사리불이 수행한다고 숲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유마 거사가 그것을 꾸짖었지요.

“선 지식아!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마음을 보고 깨끗한 것을 보며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쳐 이것으로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집착해서 착각함이 수백 가지이니, 도를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보고 깨끗한 것을 봐서 통하여 흐르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아니하고 일어나지도 않는 것이 도라고 가르쳐 그것을 공부로 삼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적 공부만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잘못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적적 공부는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적적성성 공부를 해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투과하든지, “염도염궁念到念窮 무염처無念處”를 하든지 멸진정滅盡定을 투과를 하든지, 그렇게 해서 자유자재하는 것이 해탈입니다.
   이것이 도이지, 어디에 정체해 있거나 머물러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선지식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다.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다. 등불이 이 빛의 몸(體)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用)이다. 비록 이름은 두 개가 있으나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ㆍ혜의 법도 이와 같은 것이다.

   등불하고 이 빛을 비교하는데, 앞에서 짚과 가마니나 짚신을 비교했지요. 우리의 짚은 무엇인지 그것만 알면, 이 얘기가 사실은 다 군더더기이고 쓸데없는 말입니다.
  요즘 화두 참선을 하려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만,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화두가 안들리는데 어떻게 하면 좋느냐?”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깨달은 선지식들이 말 한마디를 하거나, 법문하신 것이 모두 그 자리에서 당장 깨달으라 한 소리입니다. 육조 스님 당시에도 법문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닫는 분이 많습니다. 의심하라고 화두를 제시 한 게 아니에요. 특히 선어록은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달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선어록의 백미라는 『벽암록』을 보면, 도인 스님들이 하는 법문을 네 가지로 정리를 해놨어요. 일기一機, 일경一境, 일언一言, 일구一句. 일기는 눈썹을 올린다든지 눈을 껌뻑거린다든지 하는 것. 일경은 불자를 든다든지 주장자를 드는 것, 일언은 아주 짧은 말, 일구는 긴 말. 그런 네 가지로 법문을 요약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깨달은 분도 많습니다만, 못 깨달은 분들은 할 수 없이 말이나 일기,일경을 듣고 보고, ‘왜?’, ‘어째서’ 하고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화두라 하는 것은 본래 선지식들이 바로 깨달으라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으면 좋은데, 못 깨닫는다 하더라도 정견正見은 서야 됩니다. 얼마 전에 만난 어떤 스님은 스무 살에 출가하여 40여년이 넘게 평생 선방에서 보냈지만, 아직도 “화두가 안 들린다, 발심이 안 된다”고 솔직히 털어놓았어요.
  왜? 출가해서 일생을 선방을 보내면서 화두와 씨름 했는데 화두가 안 들릴까요?
  화두가 안 들리고, 공부가 안 되는 것은 진심眞心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부를 하더라도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럼, 왜 진심으로 안 되느냐? 부처님의 법, 부처님의 깨달음이 이 세상 무엇보다도 가치있고 의미있다는 점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이 깨달음의 가치를 여러 가지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또 부처님이 인행시에 몸을 던져 나찰에게 몸을 바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부처님 법에 대한 가치를 어느 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야 합니다.
  이런 인식이 되려면 먼저 정견이 서야 합니다. 부처님 법을 바르게 이해하여 정견이 서야 그 가치를 알고 수행하고 공부하는데 진심으로 하게 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육조단경>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걸 공부하면서 <육조단경> 법문 듣고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견正見 정도는 세워야 시간낭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육조단경>이 다 중요하지만 “정혜”“무념” 편을 보면, 불교의 핵심을 다 이야기해 놓았어요. 즉,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 연기를 여기에 잘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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