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게송을 바침呈偈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소리내어 외웠다. 혜능이 한번 들음에 이 게송이 성품을 보지 못했고 대의도 모르는 것임을 알았다.

   혜능이 동자에게 묻되, “지금 외우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

   동자가 답하기를, “너는 알지 못하는가? 대사께서 말하시길, 살고 죽는 일이 크니 가사와 법을 전하고자 한다 하시고 문인들로 하여금 각각 한 게를 지어 보이라 하여, 대의를 깨달았으면 곧 가사와 법을 전해 육대 조사로 삼는다고 말하셨는데, 신수라는 상좌가 홀연히 남쪽 회랑 벽에 무상게無相偈 한 수를 써놓았는데, 오조 스님께서 문인들에게 다 외우게 하시고, 이 게송을 깨닫는 자는 곧 자기 성품을 볼 것인 바, 이것을 의지해서 수행하면 생사고해를 벗어나게 되리라 하셨다.”

   혜능이 그 때는 행자였지만, 게송을 들어보니 성품도 보지 못했고 대의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아무리 정확하게 제시하더라도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달을 바로 봐야 합니다.

   당시 대중들은 모두 달을 못 본 분들이니까, 신수 스님의 게송이 손가락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죠. 오조 스님은 이것이 달을 보지 못한 손가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만큼 안목을 갖춘 이도 없으니까, 방편으로 이 게송을 의지해 수행하면 생사고해를 벗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혜능이 말하기를,
   “내가 이 곳에서 8개월 동안 방아를 찧었으나 아직 오조 스님의 방 앞에 가 보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나를 남쪽 회랑에 안내하면  그 게송을 보아 예배하고 또한 외워 내생에 부처님 땅에 나기를 바라네.”

   동자가 혜능을 인도하여 남쪽 회랑에 이르러, 이 게송에게 예배하고 글자를 알지 못하니 어느 사람에게 읽어주기를 청하였다. 혜능은 듣고 곧 대의를 알았다.
   또한 혜능은 한 게송을 지어, 다시 글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청해 서쪽 벽상에 써서 스스로 본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마음을 알아 견성해야 곧 대의를 깨닫는 것이다.

   혜능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은 또한 받침대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맑고 깨끗하니
   어느 곳에 먼지와 티끌이 있으리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먼지와 티끌이 물들리오.

   도량 안의 대중은 혜능이 이 게송 지은 것을 보고 다 괴이하게 여겼고, 혜능은 방앗간으로 돌아왔다. 오조 스님이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고 곧 대의를 잘 알았으나, 대중이 알까 두려워하여 이렇게 말하셨다.
   “이것도 아직 완전히 깨달은 것이 아니다.”

   혜능 행자는 방아를 찧느라고 오조 스님 방문 앞에 가본 적이 없었던가 봐요. 그런데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일부러 안 갔다고 합니다.
   오조 스님은 혜능 행자가 이미 지견知見이 상당히 난 상태에서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처음 만났을 때 더 말을 하려하다가 대중이 행자의 견처見處를 눈치채서 다른 일이 일어날까 염려가 되어, 가서 대중과 같이 일을 하라고 했지요. 혜능 행자는 오조 스님의 뜻을 간파하고 일부러 오조 스님 방 앞에 안 갔다고 합니다.
   혜능 행자는 동자의 인도로 신수 스님의 게송 앞에 가서 예배는 했지만, 글자는 몰랐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읽어달라고 해서 듣고는 그것이 자성도 보지 못했고, 대의도 알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혜능이 한 게송을 지어, 다시 글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청해서 서쪽 벽상에 써서 스스로 본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노행자는 신수 스님의 게송이 잘못된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자기가 지은 게송을 쓰게 하여 본심本心을 드러내보였습니다.

   그런데 후대 다른 판본에는 글을 써준 분이 강주江州에 별가別駕라는 벼슬을 한 장일용張日用이라는 사람입니다. 혜능 행자가 나도 게송을 하나 지었으니 글을 써달라고 청하니까, 그  사람이 행자를 무시해서 “네가 게송을 지었다고 하니 가소롭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혜능이 “미천한 사람도 고귀한 지혜가 있을 수 있고, 또 고귀한 사람도 지혜를 갖지 못할 경우가 있는데, 겉만 보고 사람을 무시하면 당신의 죄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놀란 장일용이 “내가 게송을 써줄 테니까, 만일 그 게송이 오조 스님에게 합격해서 네가 인가를 받게 되면 나를 제일 먼저 제도해다오.”라고 말했답니다.

   돈황본 단경은 『육조단경』의 다섯 본 중에서 제일 글자가 적습니다.
   다른 단경은 거기에다가 설명을 더 붙여서 글자가 많아졌는데, 이 돈황본 단경이 제일 글자가 적어요. 이것도 육조 스님 당시에 쓰여졌느냐, 아니냐? 이런 논란이 있어요. 그래서 근세에 중국학자 호적이 『육조단경』을 “신회 스님의 작품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근래에 일본에 유학 갔다 온 분 중에 그렇게 주장하는 분이 있어요.

   그런데 일부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을 할 뿐, 일본에서도 다수의 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답니다. 이 돈황본은 1907년에 중국 돈황의 동굴 속에 감춰져 있던 것을 영국 탐험가 스타인의 발굴로 인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호적이란 분이 연구한 결과 <신회어록>과 내용이 굉장히 유사하다는 거예요.
   이 단경이 만들어진 때는 8세기 말(780~790년 무렵)로 추정하는데, 그렇다면 혜능 스님이 돌아가신 지 한 65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 되는데, 우리는 어쨌든 일부 학자들이 신회 스님 저작설을 주장할지라도 육조 스님설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마음을 알아 견성해야 곧 대의를 깨닫는 것이다.
   마음을 아는 그 자체가 견성見性입니다. 견성과 식심識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아는 그 자체가 견성입니다. 그래서 대의를 깨닫는 것입니다.

   혜능 행자가 지은 게송을 다시 봅시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음이요.
   밝은 거울은 또한 대가 없음이니라.
   불성은 항상 청정하니 어느 곳에 먼지와 티끌이 있으리오.

   여기는 철저히 반야 공空 입장에서 게송이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보리라는 것도 없고 또 명경이란 것도 없는, 철저히 공사상입니다.

   불성은 항상 청정합니다. 앞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라, 고요하게 들어라 할 때에 고요하다-시끄럽다, 깨끗하다-더럽다, 이것을 초월하는 것이 깨끗하다고 했거든요. 바로 이 소리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여기에는 깨끗하다-더럽다, 조용하다-시끄럽다, 이런 게 없어요. 너다-나다, 이런 것도 없어요. 거기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그걸 우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합니다. 불립문자라고 하니까 글자만 없는 것을 불립문자라고 하는데, 문자를 세우지 않는 것은 대표적인 예이고, 모든 양변을 세우지 않고 초월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불립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뒤에 정혜定慧가 나옵니다만, 우리 존재원리에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부처도 세우지 않고, 중생도 세우지 않고, 깨끗하다-더럽다, 시끄럽다-조용하다, 있다-없다, 이런 것이 없는 자리가 있어요.

   그래서 『금강경』에 “32상은 32상이 아니기 때문에 32상이다”하거든요. 그러면 32상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 32상이 연기현상인 줄 알면, 거기에는 “실체가 없고, 무아다” 하는 것을 알 때, 그것이 진짜 32상이에요. 그러면 32상은 잘났다-못났다, 이것이 초월된 그 자리가 진짜 32상이에요.

   또 “부처란,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다” 그러면, 부처가 아니라는 게 뭔가요? 부처다-중생이다, 그 차별심이 없는 자리가 부처라는 겁니다. 이게 반야 공사상인데요. 앞의 게송은 그런 입장에서 얘기한 겁니다.

   그래서 보리도 없고, 밝은 거울도 없고, 그 불성 자리는 항상 청정해요. 있다-없다, 깨끗하다-더럽다, 이런 것이 없어요. 그런 게 없는데 거기에 무슨 때가 있느냐? 중생이라는 때도 없고, 부처라는 때도 없고, 번뇌라는 때도 없고, 반야라는 때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없다고 하는 그 자리가 진짜 반야 자리이고, 부처 자리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항상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껍데기, 겉모양만 보잖아요? 그러면 모양 말고 여기에서 말하는 본질, 이것은 있는 줄도 모르고 못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비교하여 차별하고, 또 비교하면서 나보다 나은 사람 보면 위축되고 열등의식에 빠지고, 나보다 못한 사람 보면 교만심도 부리고 목에다 깁스도 하고 어깨에 힘도 주면서, 남도 학대하고 자기도 학대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극복하려면, 거기에서 오는 괴로움을 극복하려면, 껍데기 형상 말고 하나 더 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부처님이 세상과 자기를 보는 것과 우리가 세상과 자기를 보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껍데기만 보고 있어요. 또 그걸 있다고 보고, 계속 비교하면서 좋다-나쁘다에 끄달려 괴로움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을 같이 봅니다. 이 점이 다른 것이지, 부처님은 날개가 있거나 뿔이 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같이 보자, 껍데기 형상만 보지 말고 알맹이 불성을 같이 통일시켜 보자는 겁니다. 물론 불교를 좀 공부한 분은 이런 것을 다 알지요? 아는데 그게 일상생활에서 잘 안 되지요.

   그래서 비교하는 게 많습니다. 집, 사람, 자동차, 학교, 재산, 지위, 자리 등등 비교하는 게 엄청나게 많지요? 그런데, 황새는 다리가 길고, 뱁새는 다리가 짧지요? 겉모습만 보고 비교하면 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황새가 좋다고 할 것이고, 짧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뱁새가 좋다고 합니다. 긴 것은 긴 것대로 좋고, 짧은 것은 짧은 것대로 좋습니다. 그게 평등입니다.

   그런데 이 평등한 원리를 모르고 형상만 보고 계속 비교하고,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과 시비, 대립, 싸움, 그리고 마침내 전쟁도 합니다. 그래서 정치의 진보-보수도 마찬가지고, 종교 전쟁도 또 인종 갈등, 민족 갈등을 많이 하는 것도 모두 껍데기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맹이까지 보면 흑백도 없고, 민족 갈등도 없고, 모든 것이 평등해서 평화롭고 서로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서 무한히 자유로워집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 제일 갈등을 많이 하는 것이 종교 갈등입니다. 종교 갈등은 기독교도와 회교도, 힌두교도, 유태교 다 해요. 사실 우리 불교만 안 하잖아요. 그건 왜 그러느냐? 불교가 이런 위대한 존재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안 하는 겁니다.

   저는 불교가 앞으로 세계의 모든 갈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는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이 좋은 불교를 스스로 생활화하고, 더 나아가 사회화하고, 국제화할 때 나 자신도 평화롭고 세계 평화도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대안은 불교입니다. 안 그러면 계속 싸우면서 핵무기를 터뜨릴 테지요. 지금 인류는 쓰나미에서 보듯이 지구가 한 순간에 다 망가질 정도의 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불성佛性이 항상 청정하다’하는 이 자리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게 아니고, 현재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놈!’이라는 거예요. ‘듣고 보는 바로 이놈!’ 그래서 실제로 너무 가까워서 못 보는 겁니다.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볼 건데, 너무 가까워서 안 보이는 거예요.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눈동자가 눈동자를 못 보는 것과 같다.” 이 자리는 부모보다도 더 가깝고 비교할 수 없이 가깝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나 분명히 활발하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불교는 정말로 이 세계 종교 가운데 위대한 대발견의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교만하고 어깨에 힘주라는 것은 아니고, 그런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종교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신수 스님은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했는데, “본래 청정하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했기 때문에 이것도 달을 보고 지은 게송으로 보시면 됩니다.

도량 안의 대중은 혜능이 이 게송 지은 것을 보고 다 괴이하게 여겼고, 혜능은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오조 스님이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고 곧 대의를 잘 알았으나,
   오조 스님은 혜능이 달 본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대의를 잘 알았으나, 대중이 혜능 행자가 깨달음을 얻어 전법을 받아갈 것을 알게 되면, 분란이 일어나 혜능을 해칠까 싶어 계속 오조 홍인 스님은 혜능 행자를 보호하고 있는 겁니다.

대중이 알까 두려워 이렇게 말하셨다.
“이것도 아직 완전히 깨달은 것이 아니다.”
   오조 스님이 방편으로 “이 게송도 달을 못 봤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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