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스승을 찾아감(尋師)(3)
  
오조 스님이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지방 사람인데 지금 이 산에 와서 나에게 예배하며,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혜능이 답하기를 “저는 영남의 신주 백성입니다. 이렇게 멀리 와서 스님께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오조 홍인 스님이 혜능에게 꾸짖으며 말하시기를,
   “너는 영남 사람으로 오랑캐인데, 어찌 감히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혜능이 답하기를 “사람은 남과 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과 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다르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하였다.
   오조 스님은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좌우에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더 묻지 않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과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때 혜능은 한 행자의 안내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었다.

   여기에서도 보듯이 육조 스님이 출가한 목적은 부처되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도 출가한 목적은 부처에 두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도 요즘 불교를 믿는 사람과는 굉장히 다르지요? 우리의 구경究竟은 어디까지나 부처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희망사항이 되어 있는 사람도 있고, 신념화된 분도 있지요? 희망사항이 되어선 절대 안 됩니다. 희망사항이 되면 수행해 가는데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길로 가버립니다. 우리가 이 부처라는 목표를 신념화하면 어렵게 고행하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부처되기를 신념화하면 수행해 가는 데 훨씬 힘도 나고, 마음도 여유로워지며, 안정되고, 굉장히 자유스러워집니다. 또, 전혀 생각하지 못한 힘이 나와 어떤 어려움에 맞부딪치더라도 불교적인 방법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지혜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교는 속된 말로 “모 아니면 도”입니다. 특히 우리 스님들이 “견성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가 어느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삼성경제연구소의 어느 임원이 “스님! 스님들만 그런 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다 그런 거 같습니다.” 그래요. 사실 그런 거 같아요.

   “로또” 복권 당첨되는 것이나 부동산 투기하듯이 과정을 무시한 한탕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견성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그 중간 과정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공부 과정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견성 못할 바에야 아예 공부를 안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모 아니면 도”인데, 이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견성을 못하더라도 중간과정도 체험해 가면 정말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편안하고 자유로워져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 있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 분들이 중간에 많이 있어야 거기에서 도인道人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회도 그렇잖아요. 그 사회에 중산층이 두터워야 범죄도 안 생기고, 안정되고 건전한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수행하는 중간층 스님들이 많아야 종단이 안정되고, 수행하는 풍토가 주류를 이루는 승가공동체가 되어 반목과 갈등을 일삼는 인류사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간과정이라 할 수 있는 지견知見만 열려도, 삶의 가치를 느끼며 굉장히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그 중간과정 없이 견성성불로 갈 수 있습니까? 못 갑니다! 우리 스님들이 지금처럼 “도 아니면 모”라는 식으로 수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찰나적이고 몰록 깨닫는 돈법頓法입니다. 구경까지 중간 수행 과정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깨달음을 향해 정진해야 합니다.
   스님이라고 꼭 참선하고 선방만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수행을 다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참선하는 것, 주지하면서 봉사하는 것, 염불하는 것, 다른 수행하는 것도 다 좋습니다. 어떤 것을 하던지 모두 다 “나”라는 생각을 비우는 공부이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가 됩니다. 가는 방법에서 빨리 가고, 늦게 가는 그 차이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비우고 “나”라는 생각을 비워가는 것은 어느 길을 가든지,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다 똑같습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어느 스님은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해외 유학도 다녀와 강원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늘 “참선을 해야 진짜 공부다. 이 강의가 무슨 소용인가?” 그런 의문에 늘 사로잡혀 있었답니다. 그런데, 저가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비우면 다 수행이다!” 이렇게 말한 것을 들었나 봐요. 이 말에 자기 고민이 해결되었다고 하더군요.
   모든 불교 수행은 자기를 비워가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길이든지 수행의 길은 다 있습니다. 저는 강사 스님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강원에서 강사들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고 그러느냐? 교를 버리고 선으로 간다! 참선하는 스님이 그렇게 말하면 이해가 되지만, 강사하는 스님이 그런 말을 하면 되느냐? 간경하는 이것도 견성성불로 가는 길이다. 이걸 통해서 부처되라고 했지, 이걸 버리고 참선해서 성불해라. 이런 말은 경에 없다. 그런데 왜, 강사 스스로가 경을 내버려야 된다는 그런 얘기를 하느냐, 이거 잘못된 거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길이든지 로마로 갈 수가 있습니다. 다만, 빠르고 늦은 차이뿐이에요. 그러니, 그 길로 가면 언젠가 도달합니다. 그 길에서 즐기면서 천천히 갈 수도 있고, 성질 급한 사람은 지름길로 가는 그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느 것은 불교이고, 어느 것은 불교 아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위빠사나 수행법도 인정합니다. 더러 수좌들이 “스님, 왜 위빠사나를 인정하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나는 말해요. “아, 그것도 불교인데….”
   결국 위빠사나를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봉사를 하거나 불교 수행을 하게 되면, 우리 의식이 적적성성寂寂惺惺 으로 변합니다. 적적성성으로 완성되면 주관·객관을 초월하고 해탈하여 자유자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수행을 하든지 의식이 적적성성, 즉, 『금강경』에서 말하는 “상없이 봉사하라” 하는 성성적적이 됩니다.
   또, 염불하면서 “염도염궁念到念窮 무념처無念處” 해가면 적적성성의 극치로 가는 겁니다. 모든 불교 수행의 길은 적적성성으로 갑니다. 이것이 자기를 비우는 공부예요.
   참선도 역시 잘 되고 있는 상태를 성성적적하다, 잘못하고 있는 것을 혼침도거昏沈掉擧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가집永嘉集』 을 보면, 사마타를 적적성성이라고 하고, 위빠사나를 성성적적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전부 같습니다.

   우리가 육조 스님을 공부하고 있지만, 이 분이 화두를 참구한 기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분이 선방에 가서 한 시간 좌선한 기록도 없어요. 그렇지만, 조사선의 조상은 육조 스님입니다. 육조 스님이 『금강경』을 듣고 지견知見이 나 출가해서 8개월 동안 방아를 찧지 않습니까? 이 방아 찧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말로 하면 보살행을 하는 것이죠. 요즘은 봉사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사실 그 봉사라는 말은 서양에서 온 말이고, 우리가 쓰는 말은 보살행이 맞습니다. 8개월 동안 한 것이 봉사입니다. 참선한 기록이 없어요.
   이렇게 육조 스님의 예에서 보듯이 근기가 수승한 사람은 봉사나 간경이나 참선이나 다른 게 없습니다.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마지막에 『금강경』구절을 듣고 견성을 한 이 육조 스님이 바로 조사선祖師禪을 만들어 냈습니다.
봉사하여 지견이 열리고 경을 듣고 견성한 분이 조사선을 제창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모든 수행이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법은 하나이나 사람에 영리하고 둔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참선에서도 돈오돈수頓悟頓修·돈오점수頓悟漸修 논쟁이 있지요? 간화선 수행 지침서 만들 때에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난제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오점수가 되었든 돈오돈수가 되었든, 큰집·작은 집으로 보면 좋겠다. 조상은 모두 육조 스님이다. 중국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중국은 육조의 돈오법과 신수의 점수법으로 갈라집니다. 우리는 돈오점수하는 분이나 돈오돈수하는 분들이나 전부 육조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남악회양 선사로부터 마조, 백장, 황벽 이렇게 그 계통을 다 정법으로 봅니다. 다만, 보조 스님에 와서 갈렸으니까, 그 가지만 없애면 줄기하고 뿌리는 같으니, 큰집·작은집으로 보자.”
   그런데 돈오돈수, 돈오점수뿐이 아닙니다. 모든 불교 수행의 뿌리는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불교이고 둘이 아닙니다. 단지, 여기에서 하나 차별을 둔다면 빠르고, 느린 차이 정도입니다. 사람마다 우둔하고 지혜로운 차이는 있으나, 법에는 돈과 점이 없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이 결국은 화두 들고 선방에서 참선한 분도 아닌데 견성하였고, 또, 문자도 몰랐고 불교를 한마디도 들어보지도 배우지도 않았는데, 세속에서 효도孝道를 순수하게 하다 보니 스스로 그 마음이 맑아져(自淨其意) 지견이 열렸던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순수하게 진심으로 한다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슨 이해관계나 보상심리나 이런 걸로 하면 순수하지 못합니다. 순수하게 진심으로 할 때 자정기의自淨其意가 되지요.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것이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세속에서 말하는 효도孝道도 순수하게 하면 불교 수행과 같은 공부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기독교는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신을 안 믿으면 천당 못 간다.” 하지요. 불교는 불교를 모르더라도 불교에서 말하는 양변을 여읜 마음으로 생활하면 그것도 수행이 된다고 봅니다. 즉, 불교를 통해서 우리가 그 마음을 만들어 가거나, 어떤 계기로 세속에서 그런 마음으로 수행하거나 이치는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이후에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 있는데, 그걸 자꾸 나누고 분파를 만들어 서로 반목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수행법의 목적은 견성성불見性成佛입니다. 그렇다면 빨리 가고, 늦게 가는 방법의 차이 때문에 비난하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은 불교적이지도 못하고 승부심은 법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불교 안에서만이라도 적적성성이면 다 포용합시다.
   다시 한 번 강조 드립니다. 성불이 오직 목적이라는 신념이 되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념화 된다고 생활에 구속받고 고행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이 공부를 정견에 의해 바르게 하면 마음이 더 편안하고, 너그럽고, 여유롭고, 자유로워지고 정말로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에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설은 것이 익어 가고, 익은 것은 설어집니다.
   이런 마음으로 공부가 완성된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하는 데, 저는 이 도인을 “어른의 어른이 되는 사람이다”고 말합니다. 똑같으면 싸우지요. 그런데, 어른의 어른이 된 사람은 정말로 여유롭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냥 웃어넘기면서 연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이렇듯 우리는 불자라면 누구나 목표를 견성성불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도 부처가 되는 방법을 묻기 위해서 오조 스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오조 홍인스님이 혜능에게 꾸짖으며 말하시기를,
   “너는 영남 사람으로 오랑캐인데, 어찌 감히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혜능이 답하기를 “사람은 남과 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과 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다르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하였다.
   오조 스님께서 혜능과 문답을 하면서 소위 떠보는 거죠. “너는 남방의 오랑캐인데 감히 부처가 되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혜능이 답하기를 ‘사람은 남북에 살더라도 불성에는 남북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문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지만, 대단하지요! 그런데, 지견知見만 나도 이 수준은 됩니다. 지견이 아니라 정견正見만 세워도 이런 답은 나옵니다.
   그런데, 왜 불성佛性에는 남북이 없을까요? 이것도 그냥 넘기면 안 됩니다. 불성 그 자리는 ‘남이다 북이다’, ‘동이다 서다’를 초월한 자리입니다. 거기에는 동서남북이 없습니다. 그래서 혜능이 불성에 무슨 오랑캐가 있고, 양반이 있고 쌍놈이 있느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4가지 계급이 있었는데, 부처님이 이것을 타파하신 것은 대단한 혁명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수행공동체인 승가를 만드시면서 세속의 계급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존재의 본질은 평등하다는 법法에 맞게 제도를 만드신 것은 대단한 사건이죠. 그래서 불교의 가치가 더 빛나는 것입니다.

   불성은 차별이 없고 일체가 모두 평등합니다.

   오조 스님은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좌우에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더 묻지 않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과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 때 혜능은 한 행자의 안내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었다.

   홍인 스님께서 혜능의 말을 들어보니까 700여명 대중 가운데 699명과는 말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행자가 굉장히 지견이 있는 소리를 하니까 더 확인하고 싶었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어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서 더 물어 보지 않고, 후원에 가서 대중과 같이 일이나 해라 이렇게 해서 보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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