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반야화상 1) 시중
형제들이여,
3년 5년을 공부하다가 입처(入處)가 없으면 종전의 화두를 내버리니
이것은 길을 가다가 중도에 폐하는 것과 같은 것을 알지 못함이라,
전래로 지어 온 허다한 공부가 가이 아깝구나!
뜻이 있는 자면 이 회중에 나무 좋고 물 좋고 승당이 명정한데,
맹세코 3 년만 문을 나서지 마라. 결정코 수용할 날이 있을 것이다.
어떤 무리는 공부하다가 겨우 심지(心地)가 좀 맑아져
약간의 경계가 현전하면 문득 게송을 읊으며
스스로 큰 일 다마친 사람이라 자처하고
혀뿌리나 즐겨 놀리다가 일생을 그르치고 마니,
세치 혀뿌리의 기운이 다하면 장차 무엇을 가져 보임(保任)하려는 거냐!
불자야,
생사를 벗어나고저 하거든 공부는 모름지기 참되어야 하고
깨침 또한 실다워야 하느니라. 2)
혹, 화두가 면밀하여 간단이 없어 몸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면, 이것은
"인(人)은 없어졌으나 법(法)이 아직 없어지지 않음" 3) 이라 하는 것이니,
여기에 이르러 몸을 잊고 있다가 문득 다시 몸을 생각하게 되면
마치 꿈 속에 만길절벽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때에
다만 살려고만 발버둥 치다가는 마침내 실성하는 것을 보는 것이니,
이 경지에 이르거든 오직 화두만 단단히 들고 가라.
홀연 화두를 따라서 일체를 잊어 버리면,
"인(人) 법(法)이 모두 없어짐" 이라 하는 것이니,
이때에 활탁 찬재에서 콩이 튀어야 비로소
장서방이 마시고 이서방이 취하는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니,
바로 이러한 때에 반야문하에 와서 방망이를 맞도록 하라.
어찌한 까닭이랴, 다시 제 조사의 중관(重關)을 타파하여야 하는 까닭이니,
그리하여 널리 선지식에 참예하여 일체 얕고 깊음을 다 알고,
다시 물가(邊)나 숲 아래에서 성태(聖胎)를 보양하다가 4)
용천(龍天)이 밀어냄을 기다려서, 세상에 뛰어나와 종교를 붙들어 드날리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야 하느니라.
▒ 용어정리 ▒
[1] 반야(般若) :
남악하 24세. 법을 영운지정(靈雲持定)선사에 이었다.
[2] 실참실오(實參實悟) :
신정인(神鼎인)선사 이르기를
"길가는 사람이 노상에서 재미를 붙여 놀면, 그 사람은 마침내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견해가 미세하다 하여 도를 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니, 모름지기 공부는 실참(實參)이어야 하고 깨달음 또한 실오(實悟)여야 한다. 염라왕은 말 많은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라고.
[3] 인은 없어지고 :
이 구절은 "인망(人忘) 법미망(法未忘)" "인법쌍망(人法雙忘)" 을 가려 말하고 있다. 증도가(永嘉禪師證道歌)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마음은 이것이 근(根)이요, 법(法-一切施爲와 萬象)은 이것이 진(塵)이라.
둘이 모두가 거울 위의 흠이니 흠이 다할 때 광(光)은 비로소 나타난다.
심과 법을 모두 잊어야 성품이 곧 참 도이니라."
[4] 성태를 보양(保養聖胎) :
옛 도를 얻은 자는 산속 깊숙히 살며 다만 단지에 밥이나 익혀 먹으면 족할 뿐, 20년 30년을 이름이나 이해를 아예 생각 밖에 두고 인생을 아주 크게 잊고, 다만 그 도만 지켰으니 이것을 옛사람은 "성태를 보양한다" 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