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경산 대혜고 선사 1) 답함
근일에 자기 안목도 밝지 못하면서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맥없이 "쉬어 가라" 하며, 또한 이르기를 "인연을 따라 마음을 잡으며 생각을 잊고 잠잠히 비추라" 하며, 또한 "모든 것을 상관하지 마라" 하니, 이와 같은 병든 소견으로는 설사 힘써 공부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이 일은 마칠 날이 없게 된다.
단지 마음을 한 곳으로만 지으면 아무도 얻지못할 자가 없는 것이니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축착합착 2) 하야 분연히 깨칠 것이다.
항상 세간 육진(六塵) 망상경계로 딸려가는 자기 심식을 잡아서 반야 위에 돌이켜 놓으면 비록 금생에 마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는 결코 악업에 끌리지 않을 것이니 오는 생에는 반드시 반야 중에서 분명히 수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정된 사실이라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느니라.
다만 항상 화두를 들어야 하니, 설사 망념이 오더라도
생각으로 막거나 제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힘써 간절하게 화두만을 들어라.
가나 오나 서나 앉으나 항상 화두를 들어,
화두로 오고 화두로 가면 아무 재미도 없게 될 것이니
이때가 참으로 좋은 시절이라 부디 놓아 지내지 말라.
일조에 홀연 마음빛이 활짝 밝아 시방세계를 비추면
능히 한 터럭 끝에 불국토를 나투며 3)
가는 먼지 속에 앉아서 대법륜을 굴릴 것이다.
《평》
사께서 "타인은 정(定)을 앞에 하고 혜(慧)를 후로 한다하나
나는 혜를 먼저하고 정을 후로 하겠다" 하신다.
그러나 화두만 타파하면 이른바 "쉬어가고 쉬어가라" 하는 것은
하려하지 않아도 그대로 되는 것이다.
▒ 용어정리 ▒
[1] 대혜고(大慧고) :
(1089-1163) 임제종의 대종장이다. 남악하 16세, 원오근(圓悟勤)선사의 법을 이었다. 송 철종(哲宗) 원우(元佑) 4년에 선주의 영국(寧國, 지금의 安微省寅城)에서 출생. 속성은 해(奚)씨, 12세에 향고에 글을 배웠는데 장난하다가 벼루를 던진 것이 선생의 모자에 맞아 돈으로 변상하고 돌아와서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세간의 글을 배우느니 출세간의 도를 배움만 같지 않다."하고 출가하여, 동산(東山) 혜운사(慧雲寺)에 가서 혜제(慧濟)스님을 섬기다가 축발하고 종문 제어록을 널리 보았다. 그중 운문(雲門), 목주(睦州) 어록을 가장 좋아하였다 한다. 부모의 권유로 제방에 유학하여 조동종 여러 종사를 섬겨 그 종지를 남김없이 요달하여서 깨친 바가 있었으나 만족하지 아니하고, 여러 종장에 참예하고 담당준(湛堂準) 회상에 시자가 되어 깨친 바가 있었다.
하루는 준(準)이 말하였다.
"너는 이치를 일일이 다 알아 듣느냐?"
"예, 다 압니다."
"네가 말로 할 것은 다하고, 지으라 하는 것은 다 짓고, 고금 선지식의 모든 법문은 다 안다마는 다만 한 가지만이 덜 됐다. 네가 이것을 아느냐?"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다만 왁! 한소리(도地一聲) 하나만이 모자란다. 그 까닭에 말할 때는 있고 말하지 않을 때는 없으며, 방장 안에서는 있고 방장 밖에서는 없고, 깨었을 때는 있으나 잠들었을 때는 없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생사를 당적하겠느냐!"
사 말씀이
"고가 의심하고 있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앞으로 누구를 의지하면 되겠습니까?" 하니
"극근(克勤)이 하나 있다. 내 그를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네가 찾아가 보아라. 마땅히 너의 일을 판단하여 줄 것이다. 만약에 네가 거기서 판단 짓지 못하거든 저 부처님의 일대장교를 보며 수행하라. 내생에는 결코 참선하여서 이 일을 결정내고 훌륭한 선지식이 될 것이다." 하고 얼마 안가서 준이 열반에 드니, 원오극근(圓悟克勤)을 찾아 갔다.
이곳에서 조석으로 참정하는데 한번은 극근이 말하기를,
"한 중이 운문에게 묻되 '어떤 곳이 제불이 나온 곳입니까?' 하니, 운문 답하기를 '동산이 물 위로 간다.' 하였으니 너 한마디 일러봐라." 하는데 계합하지 못하여 1년을 참구하면서 49회나 대답하였으나 다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더니, 하루는 한 거사집에서 극근이 설법하는데 "한 중이 운문에게 묻기를 '어떤 곳이 제불이 나온 곳입니까?' 하는데 운문은 '동산이 물 위로 간다.' 하였지만, 천녕(天寧)은 그렇지 아니하여 누가 와서 '어떤 곳이 제불이 나온 곳이냐?' 하면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집안이 시원해진다.' 할 것이다." 함을 듣고 활연히 깨쳤다.
깨친 바를 극근에게 말하니 가지가지로 시험하여 보고는
"아직 멀었다. 네가 비록 얻은 바는 없지 않으나 아직 대법 밝지 못했다." 하고 하루는
"너의 그 경지에 이르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다만 죽기만 하고 능히 살아나지 못했으니, 언구를 의심치 않는 것이 큰 병통이다.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고 뛴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승당할 수 있으나,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은 남을 속이지 못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모름지기 이런 도리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사 말이 "고는 지금의 얻은 것으로 이미 쾌활하니 다시 더 알아 얻을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근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후는 매일 서너번씩 입실하는데 근은 매양 "있으니 없느니가 나무에 의지한 등넝쿨과 같다(有句無句如藤기樹)" 는 공안을 가지고 힐난하면서 입실하여 입을 열기만 하면 "틀렸어! 틀렸어!" 하여 이러기를 반년이 넘도록 인가를 받지 못하고 생각 생각에 잊지 않고 지내는데, 하루는 관객들과 식사를 하다가 사가 손에 수저를 들은 것도 잊고 멍멍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근이 웃으면서
"저 놈이 황양목선(黃楊木禪,진취가 없는 공부)을 하여 도리혀 쭈그러지는구나." 하는데
사가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기를
"화상이시여, 이 도리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가마를 본 것과 같아서 핥을려야 핥을 수도 없고 버리고 갈려야 버리고도 못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더니
근이
"그 비유가 극히 좋다. 단지 그것이 금강석으로 된 밤송이다." 하였다.
또 하루는 근에게 묻기를,
"화상께서 오조에 계실 때 오조화상께서 이 공안을 들으셨다 하온데, 그때 오조화상에게 어떻게 대답하였는지 가르쳐 주십시요."
하였으나 근이 묵묵히 응하지 않으니, 사가
"그때 대중 앞에서 말씀하셨을 터인데 이제 다시 말씀 하셔서 안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근이 드디어,
"내가 그때 묻기를
'있느니 없느니가 나무에 의지한 등넝쿨 같은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오조말씀이
'말로 형용할 수도 없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느니라' 하시기에 또 묻기를
'문득 나무도 쓰러지고 등(藤)도 말라 죽었을 때 어떠합니까?' 하니
'서로 따라 오느니라' 하시더라." 하는데,
사 곧 깨치고 근에게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 하니 근은 "아직 네가 저 공안을 뚫지 못하였을까 걱정이다." 하고 여러가지 까다로운 공안을 들어 대어도 조금도 걸림이 없으니 이에 근은 손벽을 치며 기뻐하였다.
이후로는 병의 물을 거꾸로 세운 것 같고 둥근 바위를 천길 언덕에서 내굴리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그 기봉을 당하는 사람이 없으니 혹 근에게 누가 와서 참문하면 "나의 저 선자(禪者)가 마치 큰 바닷물과 같으니 너희들은 저 큰 바닷물에 가서 물어 가라." 하였다. 이때부터 극근과 분좌설법하고 낙자를 제접하니 그 이름이 총림에 떨쳤다.
극근이 운거사(雲居寺)에 옮기자 거기서 제일좌(第一座)가 되고, 극근이 성도(成都)로 떠난 뒤는 여러 곳을 거쳐 경산(俓山,절강성 여항현)에 있었는데 낙자 도속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대중이 항상 2천명이 넘어 종풍을 크게 떨치니, 세상 사람들은 임제(臨濟)의 재흥이라 하였다. 소흥(紹興) 11년(서기 1141년 송 고종때) 진회(秦檜)의 모함으로 제자 장구성(張九成)당으로 정사를 비방하였다는 구실로 의첩(衣牒)을 빼앗기고 형주(衡州)로 귀양갔다.
여기서 10년 있는 동안, 고인의 기연(機緣)을 모으고 염제(拈提)를 가하여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썼고, 다시 매주(梅州)로 옮겼다. 이곳은 기후가 불순하고 악병이 돌고 약이라고는 아주 없는 곳이었으나 여기서도 한여름에 13명의 큰 법 그릇을 만들어 내기까지 하였다. 이곳에서의 신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 사가 귀양갈 때 사를 따라갔던 제자가 백여명이었는데 이 지방의 풍토병에 걸려 반수 이상이 죽었다. 가히 고인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을 엿보게 한다.
여기서 5년만에 소흥 26년 효종(孝宗)의 특사를 받고 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68세였다. 사방에서 청하여도 가지 않더니 칙명으로 명주(明州) 아육왕산(阿育王山) 광리선사(廣利禪寺)에 갔다가 곧 다시 칙명으로 경산에 돌아왔다. 효종은 보안군왕(普安君王)때부터 사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었으므로 사를 극진히 공경하였다.
만년에 묘희암(妙喜庵) 명월당(明月堂)에 퇴거, 여기서 입적하였다. 효종 융흥(隆興) 원년이다. 향수 75세. 사의 저술로는 앞서 말한 정법안장(正法安藏) 6권, 대혜어록(大慧語錄) 30권, 법어(法語) 3권, 종문무고(宗門武庫) 1권, 서장(書狀) 2권, 대혜선사보설(大慧禪師普說) 5권이 있고, 법을 이은 제자가 94인이 된다. 가이 가풍의 성한 것이 짐작된다.
사가 교화한 가운데 특히 힘써 주장한 것은 천동정각(天童正覺)이 주장한 묵조선(默照禪)을 타파하고 활구선(活句禪)을 강조한 것이다.
임종에 당하여 시자가 유게(遺揭)를 청하니, "송 없이 갈 수 없다." 하고 붓을 들어 큰 글자로
"생(生)도 다만 이러하고 사(死)도 다만 이러한데,
게송이 있던 없던 이것이 무슨 큰 일이냐?" 쓰고는 붓을 던지고 갔다.
[2] 축착합착 :
속이 그대로 "척척" 들어 맞는다는 뜻.
[3] 터럭 끝에 불국토 :
능엄경에서 "하나가 무량이 되고, 무량이 하나가 되며,
적은 것으로 크게 나투고 큰 것으로 적게 나투며
도량을 움직이지 않고 시방세계에 두루 하고,
한 몸속에 시방 무진 허공을 머금으며
한터럭 끝에 보왕찰(寶王刹)을 나투고
가는 먼지 속에 앉아서 대법을 굴린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