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序文)
강서 당나라 하동 배휴(裴休)는 모으고 아울러 서문을 쓰노라.
대선사가 계셨으니 법휘는 희운(希運)이시다. 홍주 고안현 황벽산 축봉 아래 머무시니, 조계 육조의 적손이요 백장의 사법 제자이며 서당의 법질이다.
홀로 최상승(最上乘)의 패를 차고 문자의 인장을 여의셨으며 오로지 한 마음만을 전하고 다시 다른 법이 없으셨으니, 마음의 바탕이 또한 비었는지라 만 가지 인연이 함께 고요하여 마치 큰 해 바퀴가 허공 가운데 떠올라서 광명이 밝게 비추어 깨끗하기가 가느다란 먼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으셨다.
이를 증득한 이는 새롭고 오램이 없고 얕고 깊음이 없으며, 이를 설하는 이는 뜻으로 앎을 세우지 않고 종주(宗主)를 내세우지 않으며 문호를 열어젖히지 않은 채, 당장에 바로 이것이라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다음에라야 본래의 부처가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말씀이 간명하고 그 이치가 곧으시며 그 도는 준엄하고 그 행이 고곡하시어, 사방의 학자들이 산을 바라보고 달려와 모이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깨치니, 왕래하는 대중의 무리가 항상 일천명이 넘었다.
내가 회창 2년 종릉에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산중으로부터 스님을 고을로 모셔 용흥사에 계시도록 하고 아침저녁으로 도를 물었으며, 대중 2년 완릉에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다시 가서 예로써 맞이하여 관사에 모시고 개원사에 안거하도록 하여 아침저녁으로 법을 받아 물러 나와서 기록하였는데, 열 가운데 한둘밖에는 얻지 못하였다.
이를 마음의 인장[心印]으로 삼아 차고 다니면서 감히 드러내어 발표하지 못하다가, 이제 신령스런 경지에 드신 그 정묘한 뜻이 미래에 전하여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내어놓으니, 문하생인 태주·법건 스님들에게 주어서 옛산의 광당사로 돌아가 장로들과 청법 대중에게 지난 날 몸소 듣던 바와 같은지 다른지를 묻게 하였다.
때는 당나라 대중 11년 시월 초여드렛날에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