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유통판 언충에게 답함(1)
당신의 형 보학공이 처음부터 관법(觀法)과 묵조에 대해 알지 못하고 마음을 찾았으며, 비록 제방(諸方)의 삿되고 바름을 다 알지는 못했으나 기본이 견고하여 삿된 독은 침범할 수가 없었으며, 관법과 묵조선도 (그를) 침범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한결같이 묵조와 관법을 하여 생사의 마음을 부수지 못하면 오온(五蘊)의 마(魔)가 그 틈을 얻고 허공을 잡아 잘라서 두 갈래로 만듦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요한 곳에 있을 때는 한없는 즐거움을 받고 시끄러운 곳에 있으면 한없는 고통을 받으니, 고통과 즐거움이 한결같음을 얻고자 한다면 오로지 모든 현상을 낱낱이 세밀하게 주시(注視)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아무 생각도 없게 하지도 말며 하루 중에 놓아버려 걸림이 없게 하여 문득 당신의 옛 습기가 별안간 일어나더라도 또한 마음을 써서 내리 누르려고 하지 말고 다만 문득 일어난 곳에서 화두를 들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느니라.> 바로 이러한 때 달아오른 화로 위의 한 점의 눈과도 같으니 눈으로 판단하고 손에 익은 것을 한번 뛰어넘어야지 바야흐로 나융(懶融)선사가 말한 바로 마음 쓸 때가 바로 마음 씀이 없는 것이니 자세히 말함은 이름과 모양이 번거롭고 바로 말함은 번거롭거나 중복됨이 없으니 무심(無心)이 바로 마음 쓰는 것이고 항상 마음을 쓰는 것이 바로 무심(無心)인 것입니다.
지금 말한 무심처가 유심과 다름이 없나니 사람을 속이는 말이 아닙니다.
옛날에 바수반두(婆修盤頭)가 항상 한끼만 먹고 눕지도 않으며 여섯 때로 예불을 하며 청정하여 욕심이 없어 대중들이 귀의하였습니다.
20조(祖)인 사야다(闍夜多)가 장차 그를 제도하고자 하여 그의 문도(門徒)에게 “이렇게 두루 두타(頭陀)를 행하고 깨끗한 행을 닦으면 불도를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그 무리들이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정진(精進)이 이러한데 무엇 때문에 할 수가 없겠습니까?” 사야다가 이르되 “당신들의 스승은 도(道)와 거리가 멉니다. 설사 고행을 티끌과 같은 겁(劫)을 지내도 모두가 허망의 근본입니다.” 그 무리가 분(憤)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고 소리를 높여 사야다에게 일러 말하되 “존자는 어떤 덕행을 쌓았기에 우리의 스승을 비난하십니까?” 사야다가 “나는 도를 구하지 아니하되 또한 전도(顚倒)되지도 않으며, 나는 예불(禮佛)을 하지 않지만 또한 업신여기지도 않으며, 나는 오래 앉지 않지만 또한 게으르지 않으며, 나는 한끼만 먹지 않으나 또한 잡식(雜食)하지도 않으며 나는 만족함을 알지 못하나 또한 탐욕(貪慾)스럽지 않습니다. 마음에 바라는 바 없음이 이름하여 도라고 합니다.”라고 이르시니 바수반두가 듣고서 무루(無漏)의 지혜가 터졌으니 이른 바 먼저 정(定)으로써 움직이게 하고 뒤에 지혜로써 구제한다고 했습니다.
엉터리 장로(長老)들이 그대로 하여금 고요히 앉아서 부처되기를 기다려라하니 어찌 허망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말하되 고요한 곳에서는 잃는 것이 없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잃음이 있다고 하니 어찌 세간의 모습을 무너뜨리고 실상(實相)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어찌 나융선사가 말한 지금 설한 무심처가 유심과 다름이 없다는 것과 계합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그대는 자세히 마땅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수반두도 처음에 또한 장차 이르되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겨우 사야다의 점검(點檢)으로 부숨을 당하고 곧 말 떨어지자마자 깨달아 무루(無漏)의 지혜가 열렸으니 진실로 좋은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립니다.
중생은 미쳐 날뜀이 병이어서 부처님께서 적정바라밀(寂靜波羅蜜)의 약으로 치료하시니 병이 물러갔는데 약은 남아 있다면 그 병은 더욱 심합니다.
하나를 잡고 하나를 놓으니 어느 때에 마치겠습니까! 생사(生死)가 닥쳐오면 고요함과 시끄러움 두 가지는 모두 한 점도 소용이 없으니 시끄러운 곳에서 잃는 것이 많고 고요한 곳에서 잃는 것이 적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적고 많음, 얻음과 잃음,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묶어 한 다발을 만들어 다른 세계에 보내 놓고, 다시 바로 일상의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니며, 고요한 것도 시끄러운 것도 아니며,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아닌 곳에서 오로지 <이뭣고?>를 들어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무상(無常)이 신속하여 백년의 세월이 손가락 퉁기는 사이 곧 지나가니 다시 어찌 한가하게 공부하면서 얻음과 잃음을 따지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따지며 많고 적음을 따지고 묵조니 관법이니 하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석두(石頭)화상께서는 “삼가 현묘(玄妙)한 이치를 참구하는 사람에게 말하겠는데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한 구절을 눈을 떠도 염두해 두고 눈을 감아도 간직하고 망회(忘懷)할 때도 간직하고 관대(管帶)할 때도 간직하고 광란할 때도 간직하고 고요할 때도 간직하십시오.
나는 이와 같이 배치하여 맞추나 아마도 엉터리 장로들은 달리 배치하여 맞추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돌(咄) 이만 줄이겠습니다.
당신의 형 보학공이 처음부터 관법(觀法)과 묵조에 대해 알지 못하고 마음을 찾았으며, 비록 제방(諸方)의 삿되고 바름을 다 알지는 못했으나 기본이 견고하여 삿된 독은 침범할 수가 없었으며, 관법과 묵조선도 (그를) 침범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한결같이 묵조와 관법을 하여 생사의 마음을 부수지 못하면 오온(五蘊)의 마(魔)가 그 틈을 얻고 허공을 잡아 잘라서 두 갈래로 만듦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요한 곳에 있을 때는 한없는 즐거움을 받고 시끄러운 곳에 있으면 한없는 고통을 받으니, 고통과 즐거움이 한결같음을 얻고자 한다면 오로지 모든 현상을 낱낱이 세밀하게 주시(注視)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아무 생각도 없게 하지도 말며 하루 중에 놓아버려 걸림이 없게 하여 문득 당신의 옛 습기가 별안간 일어나더라도 또한 마음을 써서 내리 누르려고 하지 말고 다만 문득 일어난 곳에서 화두를 들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느니라.> 바로 이러한 때 달아오른 화로 위의 한 점의 눈과도 같으니 눈으로 판단하고 손에 익은 것을 한번 뛰어넘어야지 바야흐로 나융(懶融)선사가 말한 바로 마음 쓸 때가 바로 마음 씀이 없는 것이니 자세히 말함은 이름과 모양이 번거롭고 바로 말함은 번거롭거나 중복됨이 없으니 무심(無心)이 바로 마음 쓰는 것이고 항상 마음을 쓰는 것이 바로 무심(無心)인 것입니다.
지금 말한 무심처가 유심과 다름이 없나니 사람을 속이는 말이 아닙니다.
옛날에 바수반두(婆修盤頭)가 항상 한끼만 먹고 눕지도 않으며 여섯 때로 예불을 하며 청정하여 욕심이 없어 대중들이 귀의하였습니다.
20조(祖)인 사야다(闍夜多)가 장차 그를 제도하고자 하여 그의 문도(門徒)에게 “이렇게 두루 두타(頭陀)를 행하고 깨끗한 행을 닦으면 불도를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그 무리들이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정진(精進)이 이러한데 무엇 때문에 할 수가 없겠습니까?” 사야다가 이르되 “당신들의 스승은 도(道)와 거리가 멉니다. 설사 고행을 티끌과 같은 겁(劫)을 지내도 모두가 허망의 근본입니다.” 그 무리가 분(憤)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고 소리를 높여 사야다에게 일러 말하되 “존자는 어떤 덕행을 쌓았기에 우리의 스승을 비난하십니까?” 사야다가 “나는 도를 구하지 아니하되 또한 전도(顚倒)되지도 않으며, 나는 예불(禮佛)을 하지 않지만 또한 업신여기지도 않으며, 나는 오래 앉지 않지만 또한 게으르지 않으며, 나는 한끼만 먹지 않으나 또한 잡식(雜食)하지도 않으며 나는 만족함을 알지 못하나 또한 탐욕(貪慾)스럽지 않습니다. 마음에 바라는 바 없음이 이름하여 도라고 합니다.”라고 이르시니 바수반두가 듣고서 무루(無漏)의 지혜가 터졌으니 이른 바 먼저 정(定)으로써 움직이게 하고 뒤에 지혜로써 구제한다고 했습니다.
엉터리 장로(長老)들이 그대로 하여금 고요히 앉아서 부처되기를 기다려라하니 어찌 허망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말하되 고요한 곳에서는 잃는 것이 없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잃음이 있다고 하니 어찌 세간의 모습을 무너뜨리고 실상(實相)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어찌 나융선사가 말한 지금 설한 무심처가 유심과 다름이 없다는 것과 계합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그대는 자세히 마땅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수반두도 처음에 또한 장차 이르되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겨우 사야다의 점검(點檢)으로 부숨을 당하고 곧 말 떨어지자마자 깨달아 무루(無漏)의 지혜가 열렸으니 진실로 좋은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립니다.
중생은 미쳐 날뜀이 병이어서 부처님께서 적정바라밀(寂靜波羅蜜)의 약으로 치료하시니 병이 물러갔는데 약은 남아 있다면 그 병은 더욱 심합니다.
하나를 잡고 하나를 놓으니 어느 때에 마치겠습니까! 생사(生死)가 닥쳐오면 고요함과 시끄러움 두 가지는 모두 한 점도 소용이 없으니 시끄러운 곳에서 잃는 것이 많고 고요한 곳에서 잃는 것이 적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적고 많음, 얻음과 잃음,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묶어 한 다발을 만들어 다른 세계에 보내 놓고, 다시 바로 일상의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니며, 고요한 것도 시끄러운 것도 아니며,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아닌 곳에서 오로지 <이뭣고?>를 들어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무상(無常)이 신속하여 백년의 세월이 손가락 퉁기는 사이 곧 지나가니 다시 어찌 한가하게 공부하면서 얻음과 잃음을 따지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따지며 많고 적음을 따지고 묵조니 관법이니 하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석두(石頭)화상께서는 “삼가 현묘(玄妙)한 이치를 참구하는 사람에게 말하겠는데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한 구절을 눈을 떠도 염두해 두고 눈을 감아도 간직하고 망회(忘懷)할 때도 간직하고 관대(管帶)할 때도 간직하고 광란할 때도 간직하고 고요할 때도 간직하십시오.
나는 이와 같이 배치하여 맞추나 아마도 엉터리 장로들은 달리 배치하여 맞추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돌(咄)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