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참정에게 답함


  편지를 보니 성(城)에 이른 후부터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자식을 안고 손자를 보는 모든 것들이 다 그대로이되 이미 마음에 두는 것이 없다고 하며 또한 기특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며 숙세에 익혀온 옛 장애들이 점점 경미해진다고 하니 세 번 이 말을 되풀이하여 읽고 기뻐서 뛰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될 공부를 하는 영험입니다.

  만약 한 번 웃는 속에 백 천가지를 알고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뛰어난 그대가 아니었다면 불가(佛家)에서 과연 전하지 못하는 오묘함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며 만약 그대가 아니었다면 의심하고 성낸 두 글자의 법문을 미래가 다하도록 결국 무너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사 허공으로 하여금 나의 입이 되고 풀, 나무, 기와, 돌이 방광(放光)을 하여 도리(道理)를 도와 이야기한다고 해도 또한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도리는 전할수도 없으며 배울 수도 없음을 막 믿게 되었으니 모름지기 스스로 증득하고 깨달으며 스스로 인정하고 스스로가 쉬어야만 비로소 뚫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지금 한번 웃음에 문득 얻은 것이 없어졌으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말하는 일체유위(一切有爲)의 허망한 일을 취하지도 않으며 비록 다시 말에 의지해서 말하지 않으나 다시 또한 말없는데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편지에서 말한바 이미 걸리는 마음이 없고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니 가만히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계합(契合)합니다.

  이 말을 따름은 이름하여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이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파순(波旬)의 말이 됩니다.

  나는 평소에 큰 서원이 있는데 차라리 이 몸이 일체중생을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받을지언정 끝까지 이 입으로 불법을 가지고 인정으로 삼아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대가 이미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장차 옛 그대로를 따르되 다시 대법(大法)이 밝다, 밝지 못하다는 것과 근기에 응함에 장애가 있다 없다는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러한 생각을 일으킨다면 다만 옛날의 것을 그대로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받아보니 여름이 지난 후에 다시 나온다고 하니 매우 나의 뜻에 맞습니다.

  만약 다시 조바심을 내어 치구(馳求)하는 마음을 쉬지 못한다면 서로 계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날에 그대가 매우 기뻐함을 보고 이 때문에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은 말로 인해 다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쁨이 이미 안정이 되어 비로소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일은 극히 쉽지 않으니 마땅히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종종 좋은 근기의 훌륭한 지혜를 갖춘 자는 경지를 얻으면 힘을 쓰지 않고 결국 쉽다는 마음을 내고 다시 수행하지 않고 대개가 눈앞의 경계에 빼앗겨버려 주체가 되지 못하고 세월이 지나면 미혹해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하게 됩니다.

  마(魔)가 그 틈을 타서 마침내 마의 거두어 가짐을 당하게 되어 죽음에 닥쳐 또한 힘을 얻지 못하게 되니 제발 기억하십시오.

  저번에 했던 말에 이치(理)는 돈오(頓悟)라 깨달음에 이르면 번뇌는 다 녹으나 차별상(事)은 바로 없앨 수 없는 것이어서 차례를 따라 다 없애야 하나니 행주좌와에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 밖에 옛사람들의 많은 차별의 말도 모두가 실답다고 여기지 말며 그렇다고 헛된 것이라고도 여기지 마십시오.

  오래 오래하다 보면 순일하게 익어져서 자연 묵묵히 본래 자성(自性)에 계합할 것입니다.

  별도의 수승하고 특별함을 구하지 마십시오.

  옛날에 수료(水潦)화상이 등나무를 캐던 곳에서 마조(馬祖)선사에게 “어떤 것이 달마가 서쪽으로 온 까닭입니까?” 하고 물으니 마조선사가 이르되 “가까이 오라 너에게 말해 주겠다.” 수료화상이 막 가까이 오자 마조선사가 멱살을 잡고 한 번 밟으니 밟혀서 넘어졌다가 수료화상이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가가대소(呵呵大笑)하니 마조선사가 말씀하시되 “너는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웃는가?” 수료화상이 “백 천 가지 법문과 무량한 오묘한 뜻을 지금 하나의 털끝에 완전히 근원을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마조가 다시 그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설봉(雪峰)선사가 고산(鼓山)스님의 인연이 익은 것을 알고 하루는 홀연히 곧장 멱살을 잡고 “이 무엇인고?” 라고 이르시니 고산스님이 깨닫고 깨달은 마음까지 잊어버리고 오직 미소만 짓고 손을 들어 흔들 뿐이거늘 설봉선사가 “그대는 도리를 나타내는가?” 고산스님이 다시 손을 흔들면서 말하기를 “화상이시여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설봉스님이 곧 더 이상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몽산도명(蒙山道明)선사가 혜능대사(盧行者)를 쫓아 대유령(大庾嶺)에 도달하여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 하거늘 노행자가 바위 위에 던져놓고 말씀하시기를 “이 가사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어찌 힘으로 다툴 수 있겠습니까 그대 마음대로 가지고 가 보십시오.” 하니 도명스님이 그것을 들어도 움직이지 않거늘 곧 말하기를 “저는 법을 구함이요 가사와 발우 때문이 아닙니다. 원컨데 행자님은 열어 보여 주십시오.” 하니 노행자가 말씀하시기를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 면목입니까?” 도명스님이 그때 크게 깨치고 온몸에 땀이 흐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하면서 이르기를 “위로부터 온 비밀한 말씀과 뜻 외에, 다시 다른 뜻이 있습니까?” 노행자가 “내가 지금 그대에게 설한 것은 비밀스러운 뜻이 아니며 그대가 만약 자기의 면목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 비밀스러운 뜻이 도리어 그대에게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만약 설한다면 비밀스러운 뜻이 아닙니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세 분의 존숙(尊宿)의 세 가지 경우의 깨달은 인연과 그대가 한번 웃는 가운데 깨달은 것과 비교한다면 낫고 못함이 어떠합니까? 스스로 단정해 보십시오.

  또한 달리 기특하다고 할만한 도리가 있습니까? 만약 달리 있다면 도리어 일찍이 깨닫지 못함과 같을 것입니다.

  오직 부처가 되는 일만 알지언정 부처가 풀어서 말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마십시오.

  예로부터 도를 얻은 선비가 자기를 이미 충족시키고 자기의 나머지를 미루어 근기에 따라 일에 부딪힘에 마치 맑은 거울이 받침대(臺)를 대하며 맑은 거울이 손바닥에 있는 것과 같아서 호(胡)가 오면 호(胡)가 드러나고 한(漢)이 오면 한(漢)이 드러나되 뜻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만약 뜻에 집착한다면 사람에게 주는 실다운 법이 있게 됩니다.

  그대가 큰 법을 밝혀서 근기에 따라 막힘이 없고자 한다면 오직 또한 이전의 것을 그대로 따를지언정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지니 오래하다 보면 스스로 머리를 끄덕이게 될 것입니다.

  갈 때에 마주 대하고서 한 말을 자리의 곁에 써 놓으십시오.

  이외에 달리 말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말할 것이 있더라도 그대의 분상(分上)에서는 모두가 다 군더더기 말이 될 것입니다.

  말을 너무 많이 했기에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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