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증시랑에게 답함(2)


  그대가 부귀(富貴)한데 있으면서 부귀에 꺾이어 얽매인 바가 되지 아니하니 일찍이 반야지혜종자를 심지 않았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두려운 것은 공부하는 중간에 이러한 뜻을 잊고 날카로운 근기와 총명함에 장애 되어 얻은 바 있다는 마음(알았다고 하는 마음)이 앞에 있어 곧 놓아버리기 때문에 옛 조사들의 직절경요처(直截徑要:생사를 끊는 지름길)에 한칼로 두 동강내어 바로 쉴 수가 없습니다. 이 병은 단지 현명한 사대부뿐만 아니라 오래 참구한 납자(衲子)도 또한 그러합니다.

  대개가 물러나서 힘 들린 곳에 나아가 공부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총명(聰明), 의식(意識), 계교(計較), 사량(思量)으로 밖을 향해 치달아 구하며 문득 선지식이 총명, 의식, 사량, 계교 외에 본분초료(本分草料)로써 보이면 대개가 그 자리에서 어긋나 버리고 “바야흐로 옛날부터 큰스님들은 사람에게 주는 실다운 법이 있다. 예컨대 조주의 방하착과 운문의 수미산과 같은 유형이 이것이다”라고 말들하고 있습니다.

  암두(巖頭)스님께서는 “경계를 물리침이 으뜸이 되고 경계를 쫓아가는 것이 저급(低級)한 것이 된다.”고 하셨으며 또 “대개 으뜸이 되는 종지(宗旨)는 반드시 언구(句)를 알아야 되는데 어떤 것이 언구(句)인가? 온갖 것을 사량하지 않을 때를 정구(正句)라고 하며 또 거정(居頂)이라고 부르며 또한 득주(得住)라고 부르며 또한 역역(歷歷)하다고 부르며 또한 성성(惺惺)하다고 부르며 또한 이러한 때(恁
時)라고 부른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야흐로 이러한 때라야 모든 시비(是非)를 똑같이 쳐부수게 되니 겨우 이러하다면 곧 이러하지 않게 됩니다.

  옳은 글귀도 깎아버리고 그른 글귀도 또한 베어버려 마치 한 덩어리 불과 같아 닿으면 곧 타버리는 것처럼 어디에 기댈 곳이 있겠습니까?

  지금 사대부는 대개가 사량(思量)과 계교(計較)로써 집을 삼고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곧 “아마도 공(空)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하니 비유하건대 배가 아직 뒤집히지 않았는데 먼저 스스로 물로 뛰어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매우 가련하고 불쌍하다 하겠습니다.

  근래 강서(江西)에 이르러 여거인(呂居仁)을 보았는데 거인이 일대사인연에 마음을 둔 것이 매우 오래되었으나 또한 깊이 이러한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찌 총명하지 않겠습니까만은 내가 일찍이 그에게 “그대가 공(空)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는데 두려움을 알 수 있는 것은 공(空)한가, 공하지 않는가 한번 일러보시오” 라고 물으니 그가 머뭇거리며 생각하다가 계교(計較)로써 단지 대답하고자하여 그때 바로 할(喝)을 하니 지금까지도 아득하여 단서(巴鼻)를 찾아 붙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깨달아 증득하려는 마음이 앞에 있어 곧 놓아버려 스스로 장애를 만드는 것이요, 별다른 어떤 것이 장애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한번 이와 같이 공부해 보십시오.

  시간이 흘러가면 자연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장차 마음속에 깨닫기를 기다린다거나 마음에 쉬기를 기다린다면 지금부터 참구하여 미륵(彌勒)부처님께서 오시더라도 또한 깨달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쉼을 얻을 수도 없고 점점 더욱 미혹하고 답답해질 뿐입니다.

  평전(平田)화상께서 “신광(神光)은 어둡지 아니하여 만고(萬古)에 아름다운 법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옛 큰스님은 “이 일은 유심(有心)으로 구할 수 없으며 무심(無心)으로 얻을 수도 없으며 말로써 이르지도 못하며 고요한 것으로도 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일등(一等)의 진흙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가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거늘 종종 참선하는 사람들은 다만 이렇게만 생각하고 전혀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는 자세하게 보지 않습니다.

  만약에 근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듣고 들어서 그 자리에서 금강왕보금(金剛王寶劍)을 가지고 한번에 베어 이 네 가지 길의 얽힘을 베어 끊는다면 생사의 길도 또한 끊어지며, 범부와 성인의 길도 또한 끊어지며, 계교와 사량도 또한 끊어지며, 득실시비(得失是非)도 또한 끊어지니 본인의 그 자리가 벌거벗은듯 드러나고 물을 뿌려 깨끗한 것과 같아서 잡을 수가 없으니 어찌 유쾌하고,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보지 못했습니까? 옛날에 관계(灌谿)화상이 처음 임제(臨濟)선사를 참예할 때 임제선사께서 (그가) 오는 것을 보고 곧 법상에서 내려와 갑자기 멱살을 잡으니 관계화상이 곧 “알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임제스님께서 그가 이미 깨달은 것을 아시고 곧 밀쳐내고 다시 말없이 그와 더불어 거량(商量)하니 이러한 때에 관계화상이 어찌 사량, 계교로써만 응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로부터 다행히 이와 같은 본보기가 있거늘 지금 사람들은 모두가 그것으로 일을 삼지 아니하고 다만 ‘머트러운 마음씀(麤
心)이다’라고 하니 관계화상이 처음에 만약 조금이라도 깨달아 증득하며 쉼을 기다리는 마음이 앞에 있었다면 당시에 멱살을 잡히고 곧 깨달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곧 손발을 묶고 온 천하를 한바퀴 돌더라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며 쉼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평소에 계교(計較)하고 꿰어 맞춤(安排)도 식정(識情: 6식을 통해 일어나는 번뇌)이며 생사를 따라 옮겨 다님도 또한 식정이며 두려워하는 것도 또한 식정이거늘 지금 참구하여 배우는 자는 이 병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서 태어나고 죽고 하니 교(敎)에서는 ‘식(識)을 따라 행하고 지혜를 따르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때문에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면목(本來面目)에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만약 혹 한때라도 놓아 버리고 모든 것을 사량, 계교하지 않는다면 문득 육신을 잊고 본분(本分)을 밟게 되리니 곧 이 식정(識情)이 바로 진공묘지(眞空妙智)이지 다시 얻을만한 특별한 지혜가 없습니다.

  만약 달리 얻은바 있고 증득한바 있다면 도리어 옳지 않은 것입니다.

  예컨대 사람이 미혹할 때에는 동쪽을 불러 서쪽이라고 하다가 깨달았을 때는 서쪽이 곧 동쪽인지라, 달리 동쪽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진공묘지가 태허공(太虛空)과 수명이 같으니 단지 태허공 속에 한 물건이라도 그것(허공)을 방해함이 있겠습니까?

  비록 한 물건에도 장애를 받지 않으나 모든 물건이 허공에 오고 감에 문제 될 것이 없으니 이 진공묘지도 또한 그러하여 생(生)과 사(死), 범부와 성인, 번뇌가 한 점도 붙을 수 없습니다. 비록 붙을 수 없으나 삶과 죽음, 범부와 성인이 그 가운데에 오고 감에는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믿고 꿰뚫어 본다면 비로소 이것은 나고 죽음에 대자유(大自由)를 얻은 사람입니다. 비로소 조주(趙州)의 방하착(放下著)과 운문(雲門)의 수미산(須彌山)과 약간의 상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믿지 못하고 놓지 못한다면 다시 하나의 수미산(須彌山)을 짊어지고 가는 곳마다 행각(行脚)하여 눈 밝은 사람을 만나면 분명히 들어 보이십시오.

  한번 우스개 소리를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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