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선사 행장


  선사는 선주(宣州) 영국현(寧國縣人)의 사람이며, 성(姓)은 혜씨(奚氏)이다.
  어머니의 꿈에 신장(神將)이 검은 뺨에 우뚝 솟은 코를 가진 한 스님을 데리고 침실에 이르렀다. 사는 곳을 물으니 북악(北岳)이라고 대답했다.
  깨어나고 보니 태기가 있었다. 태어나던 날에 밝은 빛이 방을 뚫고 나와 비추니 모든 고을 사람들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곧 이 해(남송(南宋)철종(哲宗)원우(元祐) 4年 已巳) 11월10일 巳時에 태어났다.
  선사의 휘(諱)는 종고(宗고)이다.

  13살에 향교(鄕校)에 들어가 학우들과 더불어 놀 때 벼루를 던지다가 잘못해서 스승의 모자를 맞히고 돈 삼백으로 배상하고 돌아와서 말하되 "세간의 책을 읽는 것이 어찌 출세간의 법을 찾는 것과 같겠는가!" 16세에 동산혜운원(東山惠雲院)의 혜재대사(惠齊大師)에게 의지하여 출가했다. 17세에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으며 19세에 제방(諸方)을 돌아다니다가 태평주(太平州)의 은적암(隱寂庵)에 이르니 암자 주지가 매우 정성스럽게 맞이하면서 "어제 밤 꿈에 가람신장이 부촉하여 말하기를 내일 운봉열(雲峰悅)선사가 절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스님이 맞습니까?"라고 말하고 곧 열(悅)선사어록을 보이니 스님이 한번 보고 다 외우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운봉열선사 후신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조동종(曺洞宗)의 스승을 찾아뵙고 그 종지(宗旨)를 다 얻었지만 스님은 오히려 만족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휘종(徽宗)대관(大觀) 3年 己丑(31세)에 담당무준(湛堂無準)화상을 찾아뵙고 7년을 시자소임을 보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담당이 열반에 이르러 스님으로 하여금 원오극근(圓悟克勤)선사를 찾아뵙고 일대사를 성취하라고 지시하였다.
  스님이 선화(宣和) 4年 壬寅(34세)년에 원오선사를 찾아뵙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선사가 멀리 장산(蔣山)에 계셨기 때문에 잠시 태평사(太平寺) 평보융(平普融) 회하(會下)에 머물렀다.
  선화(宣和) 7년 乙巳(37세) 처음으로 변경(?京) 천녕사(天寧寺)에서 원오(圓悟)선사를 찾아뵈었다.
  막 40일이 지났는데 하루는 원오선사가 개당(開堂)하고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선사에게 여쭙되 "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몸을 나투신 곳입니까?" 운문이 "동산이 물위를 간다(東山水上行)"고 말씀하신 것을 들어 법문 하시면서 천녕(天寧: 원오스님 자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말한다면
훈훈한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니 처마 끝에 시원함이 생기는구나!”

  스님이 그것을 듣고 문득 앞 뒤 사이가 끊어지거늘 원오선사께서 스님으로 하여금 택목당(擇木堂)에 거쳐하게 하시고 조금이라도 시자소임을 신경 쓰지 말고 전심으로 보임케 하시었다. 후에 원오스님 방에서 어떤 스님이
유구무구(有句無句)가 등나무가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화두를 묻는 것을 듣고서 스님이 곧바로 여쭈되 “오조(五祖)선사가 계실 당시에 일찍이 이 화두를 여쭈었다고 하니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원오선사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거늘 스님이 말하되 “이미 대중의 물음에 대답하셨거늘 지금 말씀하신다고 해서 무엇이 방해되겠습니까?” 원오스님이 부득이하여 이르시되 “유구무구(有句無句)가 마치 등나무가 나무에 의지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라고 여쭈니 오조선사께서 이르시되 묘사할래야 묘사할 수 없고 그릴래야 그릴 수 없느니라. 또한 나무가 쓰러져 등나무가 마를 때는 어떠합니까? 라고 여쭈니 오조선사께서 서로 따르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대혜스님이 즉시 활연대오하여 말하되 "저는 알았습니다." 원오선사가 여러 개의 화두를 두루 들어서 물으니 모두 대답하여 막힘이 없었다.

  원오선사가 기뻐하며 이르시되 “내가 너를 속이지 못하겠구나.” 곧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 스님에게 주면서 서기직(記室)을 맡기니 스님이 이에 원오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원오선사가 촉(蜀)에 돌아가거늘 스님은 이에 몸을 숨기고 암자를 지어 기거하였다.
  후에 호구사(虎丘寺)에서 여름을 날 때 화엄경(華嚴經)을 읽다가 제칠지보살(第七地菩薩)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곳에 이르러 홀연 담당(湛堂)이 보인 바 앙굴마라(央掘摩羅)가 발우를 가지고 산모(産母)를 구했다고 하는 인연(因緣)을 확실히 알았다.
  소흥(紹興) 7년 임금이 명을 내래 쌍경사(雙徑寺)에 머무르게 했다.
  하루는 원오스님의 열반소식이 이르러 손수 글을 지어 제사에 나아갔다.
  저녁 소참법문 때에 어떤 스님이 장사(長沙)선사에게 물은 것을 들어 법문 하시되 “
남전(南泉)선사가 열반하시어 어느 곳으로 가셨습니까 라고 여쭈니 장사선사가 동촌에 나귀가 되고 서촌에 말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스님이 뜻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 장사선사가
타고자하면 곧 타고 내리고자 하면 곧 내린다고 말씀하셨지만 만약 나라면 곧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스님이
원오선사가 열반하시어 어느 곳으로 가셨냐고 묻는다면 곧 그에게 말하되 대아비지옥(大阿鼻地獄)으로 갔다고 할 것이며 뜻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굶주리면 끓는 구리물을 마시고 목마르면 쇳물을 마신다고 할 것이며, 도리어 사람이 구할 수 없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며 어째서 구할 수 없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평소에 차 마시고 밥 먹는 도리니라고 하리라.”

  11년 5월 간신(姦臣) 진회(秦檜)가 스님이 장구성(張九成)과 작당을 했다고 아뢰어 승복과 도첩을 빼앗고 형주(衡州)에 15년 동안 귀양 보냈다.
  26년 10월 명(命)을 내려 매양(梅陽)으로 옮겼다가 오래지 않아 승려의 신분을 되찾고 풀려났다.
  11월에 칙서를 내려 아육왕사(阿育王寺)에 머물게 하였다.
  28년 칙서를 내려 스님으로 하여금 다시 경산사(徑山寺)에 머물게 하여 크게 원오의 종풍을 펴게 하였으니 도의 융성함이 당시에 으뜸이었고 대중이 이천여명에 이르렀다.
  신사년(辛巳年) 봄에 물러 나와 명월당(明月堂)에 기거하였다.
  다음해 壬午年(고종32년) 임금이 대해선사(大慧禪師)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효종 융흥원년(孝宗隆興元年) 계미(癸未)에 거듭 명월당에 기거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에 대중이 별똥 하나가 절 서쪽에 떨어지는데 빛이 붉은 것을 보았다.
  스님은 이어 약간의 병세를 보이었다.
  8월 9일에 대중에게 “아마도 내일 가련다.” 라고 말씀하시고 그날 저녁 5시(五鼓)정도에 손수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쓰고 아울러 뒷일을 부촉하니 요현(了賢)이라는 스님이 게송을 청하니 스님이 곧 크게 ‘
(生)도 다만 이러하고 죽음도 다만 이러하거늘 열반게(涅槃偈)가 있고 없고에 무엇하러 열 내겠는가?’ 라고 쓰시고 편안하게 열반하셨다.

  세수(世壽)는 75세요, 법랍(法臘)은 58세이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고 휘(謚)를 내려 보각(普覺)이라 하고 탑(塔)은 보광(普光)이라 했다.
  현재 살아 계실 때의 호(號)와 열반하신 후의 휘(謚)를 들어 대혜보각(大慧普覺)이라고 하는 것은 남악회양(南岳懷讓)화상의 호가 또한 대혜(大慧)여서 구별하기 위함 때문이다.
  어록(語錄) 80권이 있는데 대장경(大藏經)을 따라 유통되고 법을 이은 사람이 83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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