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장상국(張相國)의 청으로 영가에게 소참법문을 하다

   "변숭(邊崇)의 영혼이여, 밝고 신령한 그 한 점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어야 할 번뇌도 없고 구해야 할 보리도 없다. 가고 옴도 없고 진실도 거짓도 없으며 남도 죽음도 없다. 4대에 있을 때도 그러했고, 4대를 떠난 때도 그러하다.
   지금 을묘년 12월 14일 밤에 천보산(天寶山) 회암선사(檜岩禪寺) 에서 분명히 내 말을 들으라. 말해 보라. 법을 듣는 그것은 번뇌에 속한 것인가, 보리에 속한 것인가, 옴에 속한 것인가 감에 속한 것인가, 진실에 속한 것인가, 허망에 속한 것인가, 남에 속한 것인가 죽음에 속한 것인가. 앗 !.
   전혀 어떻다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결국 어디서 안신입명(安身立命) 하는가."
   죽비로 향대 (香臺) 를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알겠는가. 만일 모르겠으면 마지막 한마디를 더 들어라. 영혼이 간 바로 그 곳을 알려 하는가. 수레바퀴 같은 외로운 달이 중천에 떴구나."
   다시 향대를 치고는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17. 나라에서 주관한 수륙재(水陸齋)에서 육도중생에게 설하다

   스님께서 자리에 올라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승의공주(承懿公主:공민왕비 노국대공주를 말함)를 비롯하여 여러 불자들은 아는가. 여기서 당장 빛을 돌이켜 한번 보시오.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을 막론하고 누가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밟을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면 잔소리를 한마디 하겠으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살피시오.
   승의공주여, 36년 전에도 이것은 난 적이 없었으나 과거의 선인 (善因)으로 인간세계에 노닐면서 만백성의 자모(慈母)가 되어 온갖 덕을 베풀다가, 조그만 묵은 빚으로 고요히 몸을 바꿨소. 그러나 36년 후에도 이것은 죽지 않았으니, 인연이 다해 세상을 떠나 생애(生康)를 따로 세웠소.
   승의공주여, 4대가 생길 때에도 밝고 신령한 이 한 점은 그것을 따라 생기지 않았고, 4대가 무너질 때에도 밝고 신령한 이 한 점은 그것을 따라 무너지지 않소. 나고 죽음과 생기고 무너짐은 허공과 같으니, 원수니 친한 이니 하는 묵은 업이 지금 어디 있겠소. 이제 이미 없어졌으매 찾아도 자취가 없어 드디어 허공같이 걸림이 없소. 세계마다 티끌마다 묘한 본체요, 일마다 물건마다 모두가 주인공이오.
   소리와 빛깔이 있으면 분명히 나타나고, 빛깔과 소리가 없으면 그윽이 통하오. 상황에 맞게 때에 맞게 당당히 나타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묘하고 오묘하오. 자유로운 그 작용이 다른 물건이 아니며 상황에 따라 죽이고 살림이 모두 그의 힘이오. 승의공주여, 알겠는가. 만일 모르겠으면 이 산승이 공주를 위해 확실히 알려 주겠소."
 
   죽비로 탁자를 치면서 악! 하고 할을 한 번 한 뒤에 말씀하셨다.
   "여기서 단박 밝게 깨쳐 묘한 관문을 뚫고 지나가면, 3세 부처님네와 역대 조사님네와 천하 선지식들의 골수를 환히 보고, 3세 부처님네와 역대 조사님네와 천하의 선지식들과 손을 잡고 함께 다닐 것이오."
   또 한 번 내리친 뒤에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많은 생의 부모와 여러 겁의 원수 친한 이를 제도하고, 이렇게 해서 세세생생에 함부로 자식이 되어 어머니를 해치고 친한 이를 원망한 일을 제도하며, 이렇게 해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승 저승의 모든 원수나 친한 이를 제도하시오. 이렇게 해서 갖가지 고통을 받는 모든 지옥중생을 제도하고, 주리고 목마른 아귀중생을 제도하며, 축생계에서 고생하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아수라계에서 성내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며, 인간세계에서 잘난 체하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천상에서 쾌락에 빠져 있는 모든 하늘 무리를 제도하시오."
   다시 죽비를 던지고 말씀하셨다.
   "언덕에 올랐으면 배를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거니, 무엇하러 사공에게 다시 길을 물으랴."


회향 (廻向)

   스님께서 법좌에 올라 향을 사른 뒤에 죽비로 향대를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승의 선가(仙駕)를 비롯하여 여러 불자들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와 어울려 여러 세계에 잘못 들었소. 그리하여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 혹은 천상에 있으면서 떴다 가라앉음이 일정치 않고 고락이 같지 않았으니, 그것은 오직 그대들이 한량없는 겁을 지나면서 본래면목을 몰랐기 때문이오.
   승의선가여, 원수나 친한 이를 면하고 생사를 면하여 고해를 건너려거든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아 주인공의 본래면목을 아는 것이 제일이오. 승의공주는 인간에 태어나되 왕궁에 태어나 30여 년을 인간세상에 노닐면서 한 나라의 공주가 되어 만백성들을 이롭게 하였으니, 그것은 부모가 낳아준 면목이지만, 부모가 낳아주기 전의 면목은 어떤 것인가.
   지금 4대는 흩어지고 신령하게 알아보는 그것(영식靈識)만이 홀로 드러나고 텅 비고 밝은 그것(허명虛明) 만이 혼자 비치어 멀고 가까움에 관계가 없고, 산하와 석벽도 막지 못하니 자, 어서 오시오. 지금 여기서 내 말을 분명히 듣는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확실히 보아 의심이 없으면, 시방 불국토 어딜 가나 자유자재할 것이오. 그렇지 못하다면 이 산승은 또 공주를 위해 수륙재(水陸齋)의 인연을 조금 말할 것이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살피시오.
   물과 땅의 어둡고 밝은 큰 도량에서 티끌 같은 세계를 다 드러내오. 3도 (三途) 에서는 법을 듣고 고통을 모두 떠나고, 6취(六趣) 에서는 은혜를 입어 법체(法體)가 편안하오. 원한 있는 마음은 끊기 쉬우나, 끝이 없는 성품은 헤아리기 어렵소. 이 집에 가득한 형제들이여, 알겠는가.
   청풍명월이 곳곳에서 반짝이니 이 법회에는 부처님네가 다 내려오셨고, 3현10성(三賢十聖)이 다 귀의하오. 마음을 편히하고 공양을 받아 기쁜 마음을 내고, 금강(金剛) 의 묘각(妙覺) 으로 점차 들어가시오. 중생들 이 항하수 모래만큼의 죄를 골고루 지으나, 한마디(一句)에 다 녹이고 한 기틀을 돌리시오. 이러한 공덕 한량 없거니, 승의 선가는 정토로 돌아가오. 말해 보시오. 승의 선가는 정토에 있는가, 예토에 있는가. 부처세계에 있는가. 중생세계에 있는가. 이 세계에 있는가, 저 세계에 있는가."
   또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정토라 할 수도 없고 예토라 할 수도 없으며, 부처세계라 할 수도 없고 중생세계라 할 수도 없으며, 이 세계라 할 수도 없고 저 세계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니, 어디라고도 할 수 없다면 결국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죽비를 던지고 말씀하셨다.
   "미세한 의혹을 모두 없애 한 물건도 없나니, 대원경지 속에서 마음대로 노닌다."


빈당(殯堂)에서 영가에게 소참법문을 하다

   스님께서 승의공주를 부른 뒤에 말씀하셨다.
   "승의공주는 36년 동안 4대를 부지해 오다가 불과 바람은 먼저 떠나고 흙과 물만 남아 있소. 산승은 독손(毒手) 으로 끝까지 헤쳐놓고 한바탕 소리칠 것이니, 마음대로 깨치고 마음대로 쓰시오."
   할을 한 번 하고 말씀하셨다.
   "승의선가는 허공을 누비되 앞뒤가 없고, 한 티끌도 붙지 않아 당당히 드러났소. 몸을 뒤쳐 바로 위음왕 밖을 뚫어, 크나큰 참바람을 헛되이 간직하지 마시오."
   주장자로 널을 세 번 내리친 뒤에 또 부르고는 "승의공주여, 맑은 못에 비친 가을달을 밟아 보시오. 온 천지에 얼음 얼고 서리치리니" 하고 할을 한 번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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