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行狀)

   11년(1351) 신묘 2월 2일, 평산스님을 하직할 때 평산스님은 다시 글을 적어 전송하였다.
   "삼한의 혜근 수좌가 멀리 호상(湖上)에 와서 서로 의지하고 있다가, 다시 두루 참학하려고 용맹정진할 법어를 청한다. 토각장(兎角杖)을 들고 천암(千巖)의 대원경(大圓鏡)속에서 모든 조사의 방편을 한 번 치면, 분부할 것이 없는 곳에서 반드시 분부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게송을 지어 주었다.

    회암(檜岩)의 판수(板首)가 운문(雲門)을 꾸짖고
    백만의 인천(人天)을 한 입에 삼켰네
    다시 밝은 스승을 찾아 참구한 뒤에
    집에 돌아가 하는 설법은 성낸 우뢰가 달리듯 하리.
    檜巖板首罵雲門 百萬人天一口呑
    更向明師參透了 廻家說法怒雷奔

   스님은 절하고 하직한 뒤에 명주(明州)의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으로 가서 관음을 친히 뵈옵고, 육왕사(育王寺)로 돌아와서는 석가상(繹迦像)에 예배하였다. 그 절의 장로 오광(悟光)스님은 다음 게송을 지어 스님을 칭찬하였다.

    분명히 눈썹 사이에 칼을 들고
    때를 따라 죽이고 살리고 모두 자유로워
    마치 소양(昭陽)에서 신령스런 나무 보고
    즐겨 큰 법을 상류(常流)에 붙이는 것 같구나.
    當陽掛起眉間劍 殺活臨機總自由
    恰昭昭陽見靈樹 肯將大法付常流

   스님은 또 설창(雪窓)스님을 찾아보고 명주에 가서 무상(無相) 스님을 찾아보았다. 또 고목영(奇木榮)스님을 찾아가서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았는데 고목스님이 물었다.
   "수좌는 좌선할 때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
   "쓸 마음이 없소."
   "쓸 마음이 없다면 평소에 무엇이 그대를 데리고 왔다갔다하는가?"
   스님이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니 고목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은 부모가 낳아준 그 눈이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는 무엇으로 보는가?"
   스님은 악! 하고 할(喝)을 한 번 하고는 "어떤 것을 낳아준 뒤다 낳아주기 전이다 하는가?" 하니 고목스님은 곧 스님의 손을 잡고, "고려가 바다 건너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하였다. 스님은 소매를 떨치고 나와버렸다.
  
   壬辰년(1352) 4월 2일에 무주(茂州) 복룡산(伏龍山) 에 이르러 천암원장(千巖元長) 스님을 찾았다. 마침 그 날은 천여 명의 스님네를 모아 입실할 사람을 시험해 뽑는 날이었다.
   스님은 다음의 게송을 지어 올렸다.

    울리고 울려 우뢰소리 떨치니
    뭇 귀머거리 모두 귀가 열리네
    어찌 영산(靈山)의 법회뿐이었겠는가
    구담(瞿曇)은 가지도 오지도 않네.
    擊擊雷首振 群聾盡豁開
    豈限靈山會 瞿曇無去來

   그리고 절차에 따라 입실하였다.
   천암스님은 물었다.
   "스님은 어디서 오는가?"
   "정자선사에서 옵니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는 어디서 왔는가?"
   "오늘은 4월 2일입니다."
   천암스님은 "눈 밝은 사람은 속이기 어렵구나" 하고 곧 입실을 허락하였다. 스님은 거기 머물게 되어 여름을 지내고 안거가 끝나자 하직을 고했다.
   천암스님은 손수 글을 적어 주며 전송하였다.
  
   "석가 늙은이가 일대장교를 말했지만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말이다. 마지막에 가섭이 미소했을 때 백만 인천이 모두 어쩔 줄을 몰랐고, 달마가 벽을 향해 앉았을 때 이조는 눈 속에서 있었다. 육조는 방아를 찧었고, 남악(南嶽)은 기왓장을 갈았으며, 마조(馬祖)의 할(喝) 한 번에 백장(百丈)은 귀가 먹었고, 그 말을 듣고 황벽(黃岫)은 혀를 내둘렀었다.
   그러나 일찍이 장로 수좌를 만들지는 못하였다. 진실로 이것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으로 그릴 수도 없으며, 칭찬할 수도 없고 비방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저 허공처럼 텅 비어 부처나 조사도 볼 수 없고 범부나 성인도 볼 수 없으며, 남과 죽음도 볼 수 없고 너나 나도 볼 수 없다. 그 지경(테두리, 범위)에 이르게 되어도 그 지경이라는 테두리도 없고, 또 허공의 모양도 없으며 갖가지 이름도 없다.
   그러므로 형상도 이름도 떠났기에 사람이 받을 수 없나니, 취모검(吹毛劍)을 다 썼으면 빨리 갈아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취모검은 쓰고 싶으면 곧 쓸 수 있는데 다시 갈아두어서 무엇하겠는가. 만일 그대가 그것을 쓸 수 있으면 노승의 목숨이 그대 손에 있을 것이요, 그대가 그것을 쓸 수 없으면 그대 목숨이 내 손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할을 한 번 하였다.
  
   스님은 천암스님을 하직하고 떠나 송강(松江)에 이르러 요당(了堂)스님과 박암(泊艤)스님을 찾아보았으나 그들은 감히 스님을 붙잡아 두지 못하였다.
   그 해 5월에 대도 법원사로 돌아와 다시 지공스님을 뵈었다. 지공스님은 스님을 방장실로 맞아들여 차를 권하고, 드디어 법의 한 벌과 불자 하나와 범어로 쓴 편지 한 통을 주었다.

    백양(百陽)에서 차 마시고 정안(正安)에서 과자 먹으니
    해마다 어둡지 않은 한결같은 약이네
    동서를 바라보면 남북도 그렇거니
    종지 밝힌 법왕에게 천검(千劍)을 준다.
    百陽喫茶正安果 年年不昧一通藥
    東西看見南北然 明宗法王給千劍

   스님은 답하였다.

    스승님 차를 받들어 마시고
    일어나 세 번 절하니
    다만 이 참다운 소식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奉喫師茶了 起來卽禮三
    只這眞消息 從古至于今

   그리고는 거기서 한 달을 머물다가 하직하고, 여러 해 동안 연대 (燕代)의 산천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 도행(道行)이 황제에게 들려, 을미년(1355) 가을에 성지(聖旨)를 받고 대도의 광제선사(廣濟禪寺)에 머물다가, 丙申년(1356)  10월 15일에 개당법회를 열었다. 황제는 먼저 원사 야선첩목아 (院使 也先帖木兒)를 보내 금란가사와 폐백을 내리시고 황태자도 금란가사와 상아불자를 내렸다. 이 날에는 많은 장상(將相) 과 그들의 관리, 선비들, 여러 산의 장로들과 강호의 승려들이 모두 모였다. 스님은 가사를 받아들고 중사(中使)에게 물었다.
   "산하대지와 초목총림이 하나의 법왕신인데 이 가사를 어디다 입혀야 하겠는가?"
   중사는 모르겠다 하였다. 스님은 자기 왼쪽 어깨를 기리키며 "여기다 입혀야 하오" 하고는 다시 대중에 물었다.
   "맑게 비고 고요하여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찬란한 이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대중은 대답이 없었다. 스님은 "구중 궁궐의 금구(金口)에서 나왔다" 하고는 가사를 입고 황제를 위해 축원한 뒤에 다시 향을 사르고 말하였다.
   "이 하나의 향은 서천의 108대 조사 지공대화상과 평산화상에게 받들어 올려 법유(法乳)의 은혜를 갚습니다."
  
   17년(1357) 정유년에 광제사를 떠나 연계(燕溪)의 명산에 두루 다니다가 다시 법원사로 돌아와 지공스님에게 물었다.
   "이제 제자는 어디로 가야 하리까?"
   지공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 `삼산양수(三山兩水)' 사이를 택해 살면 불법이 저절로 흥할 것이다."
  
   무술년(1358) 3월 23일에 지공스님을 하직하고 요양(遼陽)으로 돌아와 평양과 동해 등 여러 곳에서 인연을 따라 설법하고, 경자년(1360) 가을에 오대산에 들어가 상두암(象頭庵)에 있었다. 그때 강남지방의 고담(古潭)스님이 용문산을 오가면서 서신을 통했는데, 스님은 게송으로 그에게 답하였다.

    임제의 한 종지가 땅에 떨어지려 할 때에
    공중에서 고담 노인네가 불쑥 튀어나왔나니
    삼척의 취모검을 높이 쳐들고
    정령(精靈)들 모두 베어 자취 없앴네.
    臨濟一宗當落地 空中突出古潭翁
    把將三尺吹毛劍 斬盡精靈永沒

   고담스님은 백지 한 장으로 답하였는데, 겉봉에는 `군자천리동풍(君子千里同風) '이라고 여섯 자를 썼다. 스님은 받아 보고 웃으면서 던져버렸다. 시자가 주워 뜯어 보았더니 그것은 빈 종이었다. 스님은 붓과 먹 두 가지로 답하였다.
  
   신축년(1361) 겨울에 임금은 내첨사 방절(方節)을 보내 내승마 (內乘馬)로 스님을 성안으로 맞아들여, 10월 15일에 궁중으로 들어갔다. 예를 마치고 마음의 요체에 대해 법문을 청하니, 스님은 두루 설법한 뒤에 게송 두 구를 지어 올렸다. 임금은 감탄하면서, "이름을 듣는 것이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하다" 하시고 만수가사와 수정불자를 내리셨다. 공주도 마노불자를 보시하고, 태후는 친히 보시를 내리셨다. 그리고 신광사(神光寺)에 머물기를 청하니 스님은 "산승은 다만 산에 돌아가 온 마음으로 임금을 위해 축원하고자 하오니 성군의 자비를 바라나이다" 하면서 사양하였다.
   임금은 "그렇다면 나도 불법에서 물러가리라" 하시고 곧 가까운 신하 김중원(金仲元)을 보내 가는 길을 돕게 하였다. 스님은 할 수 없어 그 달 20일에 신광사로 갔다.
  
   11월에 홍건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도성이 모두 피란하였으나, 오직 스님만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보통때와 같이 설법하고 있었다. 하루는 수십 기(騎)의 도적들이 절에 들어왔는데, 스님은 엄연히 그들을 상대하였다. 도적의 우두머리는 침향(沈香) 한 조각을 올리고 물러갔다. 그 뒤로도 대중은 두려워하여 스님에게 피란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말리면서, "명(命)이 있으면 살 것인데 도적이 너희들 일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 뒤에 어느 날 대중이 다시 피란을 청하였으므로 스님은 부득이 허락하고 그 이튿날로 기약하였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의관을 갖추고 절하며, "대중이 흩어지면 도적은 반드시 이 절을 없앨 것입니다. 스님은 부디 뜻을 굳게 가지십시오" 하고 곧 물러갔다. 그 이튿날 스님은 토지신을 모신 곳에 가서 그 모습을 보았더니 바로 꿈에 본 얼굴이었다. 스님은 대중을 시켜 경을 읽어 제사하고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도적은 여러 번 왔다갔으나 재물이나 양식, 또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지 않았다.
  
   계묘년(1363) 7월에 재삼 글을 올려 주지직을 사퇴하려 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스님은 스스로 빠져나와 구월산(九月山) 금강암으로 갔다. 임금은 내시 김중손(金仲孫) 을 보내 특별히 내향(內香)을 내리시고, 또 서해도(西海道) 지휘사 박희, 안렴사 이보만(按兼使 李譜萬) , 해주목사 김계생(海州牧使 金繼生)  등에게 칙명을 내려 스님이 주지직에 돌아오기를 강요하였다. 스님은 부득이 10월에 신광사로 돌아와 2년 동안 머무시다가, 을사년(1365) 3월에 궁중에 들어가 글을 올려 물러났다. 그리고는 용문(龍門) ·원적(圓寂)등 여러 산에 노닐면서 인연을 따라 마음대로 즐겼다.
  
   병오년(1366) 3월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정양암(正陽艤)에 있었다. 정미년(1367) 가을에 임금님은 교주도(交州道) 안렴사 정양생(鄭良生)에게 명하여 스님에게 청평사에 머무시기를 청하였다. 그 해 겨울에 보암(普艤)장로가 지공스님이 맡기신 가사 한 벌과 편지 한 통을 받아 가지고 절에 와서 스님에게 주었다. 스님은 그것을 입고 향을 사른 뒤에 두루 설법하였다.
  
   기유년(1369) 9월에 병으로 물러나 또 오대산에 들어가 영감암(靈惑艤)에 머물렀다.
   홍무(洪武) 경술년(1370) 1월 1일 아침에 사도 달예(司徒 達睿) 가 지공스님의 영골과 사리를 받들고 회암사에 왔다. 3월에 스님은 그 영골에 예배하고 산을 나왔다. 임금은 가까운 신하 김원부 (金元富)를 보내 스님을 맞이하고 영골에 예배하였다. 스님은 성 안에 들어가 광명사(廣明寺)에서 안거를 지냈다.
   8월 3일에 내재(內齋)에 나아가 재를 마치고 두루 설법하였다.
   17일에 임금은 가까운 신하 안익상(安益祥)을 보내 길을 도우라 하고 스님께 회암사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9월에는 공부선(工夫選)을 마련하고 양종오교(兩宗五敎)의 제방 승려를 크게 모아 그들의 공부를 시험했는데, 그때 스님에게 주맹(主盟)이 되기를 청하였다.
   16일에 선석(選席)을 열었다. 임금님은 여러 군(君)과 양부(兩府)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나와 보셨다. 그리고 선사 강사 등 여러 큰 스님네와 강호의 승려들이 모두 모였다. 그때 설산국사 (雪山國師:화엄종의 종사인 千熙스님을 말함)도 그 모임에 왔다. 스님은 국사와 인사하고 처음으로 방장실에 들어가 좌복을 들고 "화상!" 하였다. 국사가 무어라 하려는데 스님은 좌복으로 그 까까머리를 때리고는 이내 나와버렸다.
   사나당(舍那堂) 안에 법좌를 만들고 향을 사른 뒤에, 스님은 법좌에 올라 질문을 내렸다.
   법회에 있던 대중은 차례로 들어가 대답하였으나 모두 모른다 하였다. 어떤 이는 이치로는 통하나 일에 걸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너무 경솔하여 실언하기도 하며, 한마디 한 뒤 곧 물러가기도 하였다. 임금은 매우 불쾌해 보였다. 끝으로 환암 혼수(幻庵混修) 스님이 오니 스님은 3구(三句)와 3관(三關)을 차례로 물었다.
   그보다 먼저 스님이 금경사(金脛寺)에 있었을 때 임금은 좌가대사 혜심(左街大師 慧深)을 시켜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법문으로 공부한 사람을 시험해 뽑습니까?"
   스님이 대답하였다.
   "먼저 입문(入門)등 3구(三句)를 묻고, 다음에 공부10절(工夫十節)을 물으며, 나중에 3관(三關)을 물으면 공부가 깊은지 얕은지를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중이 다 모르기 때문에 10절과 3관은 묻지 않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임금이 천태종(天台宗)의 선사(禪師)인 신조(神照)를 시켜 공부10절을 물으시니 스님은 손수 써서 올렸다.
   18일에 임금은 지신사 염흥방(知申使 廉興)을 스님이 계시던 금경사로 보내셨고, 그 이튿날 또 대언 김진(代言 金鎭)을 보내 스님을 내정(內庭)으로 맞아들여 위로하신 뒤 안장 채운 말(鞍馬) 을 내리셨다. 그리고는 내시 안익상(安益祥)을 보내 회암사로 보내드리니, 스님은 회암사에 도착하자 말을 돌려보내셨다.
  
   신해년(1371) 8월 26일에 임금은 공부상서 장자온(工部商書 張子溫)을 보내 편지와 도장을 주시고, 또 금란가사와 안팎 법복과 바루를 내리신 뒤에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로 봉하시고, 태후도 금란가사를 올렸다. 그리하여 동방의 제일 도량인 송광사에 있게 하셨는데, 내시 이사위(李君渭)를 보내 길을 돕게 하여 28일에 회암사를 출발하여 9월 27일에 송광사에 도착하였다.
   임자년(1372) 가을에 스님은 우연히 지공스님이 예언한 `삼산양수'를 생각하고 회암사로 옮기기를 청하였다. 임금은 또 이사위를 보내어 회암사로 맞아 오셨다.
   9월 26일에는 지공스님의 영골과 사리를 가져다 회암사의 북쪽 봉우리에 탑을 세웠다.
   계축년(1373) 정월에는 서운(瑞雲) ·길상(吉祥)등 산에 노닐면서 여러 절을 다시 일으키고, 8월에 송광사로 돌아왔다.
   9월에 임금님은 또 이사위를 보내 회암사에서 소재법회(消災法會)를 주관하라 청하시고, 갑인년(1374) 봄에 또 가까운 신하 윤동명(尹東明)을 보내 그 절에 계시기를 청하였다.
   이에 스님은 "이 땅은 내가 처음으로 불도에 들어간 곳이요, 또 우리 스승(先師)의 영골을 모신 땅이오. 더구나 우리 스승께서 일찍이 내게 수기하셨으니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 하고 곧 대중을 시켜 전각을 다시 세우기로 하였다.
   9월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스님은 몸소 빈전(殯殿)에 나아가 영혼에게 소참법문을 하시고 서식을 갖추어 왕사의 인(印)을 조정에 돌렸다.
   지금 임금께서도 즉위하여 내시 주언방을 보내 내향(內香)을 내리시고 아울러 인보(印寶)를 보내시면서 왕사로 봉하였다.
  
   병진년(1376) 봄에 이르러 공사를 마치고 4월 15일에 크게 낙성식을 베풀었다. 임금은 구관 유지린(具官 柳之璘)을 보내 행향사 (行香使)로 삼았으며, 서울에서 지방에서 사부대중이 구름과 바퀴살처럼 부지기수로 모여들었다.
   마침 대평(臺評)은 생각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아주 가까우므로 사부대중의 왕래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니 혹 생업에 폐해를 주지나 않을까'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명으로 스님을 영원사 (瑩源寺)로 옮기라 하고 출발을 재촉하였다. 스님은 마침 병이 있어 가마를 타고 절 문을 나왔는데 남쪽에 있는 못가에 이르렀다가 스스로 가마꾼을 시켜 다시 열반문으로 나왔다. 대중은 모두 의심하여 목놓아 울부짖었다.
   스승은 대중을 돌아보고, "부디 힘쓰고 힘쓰시오. 나 때문에 중단하지 마시오. 내 걸음은 여흥(瘻興)에서 그칠 것이오" 하였다.
   5월 2일에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卓詹)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병이 너무 심해 배를 타고 가고 싶소."
   곧 문도 10여 명과 함께 물을 거슬러올라간 지 7일 만에 여흥에 이르러 다시 탁첨에게 말하였다.
   "내 병이 너무 위독해 이곳을 지날 수 없소. 이 사정을 나라에 알리시오."
   탁첨이 달려가 나라에 알렸으므로 스님은 신륵사(神勒寺)에 머물게 되었다. 며칠을 머무셨을 때, 여흥수 황희직(瘻興守 黃希直) 과 도안감무 윤인수(道安監務 尹仁守)가 탁첨의 명령을 받고 출발을 재촉했다. 시자가 이 사실을 알리자 스님은 말하였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이제 아주 가련다."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님은 주먹을 세웠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4대(四大)가 각기 흩어지면 어디로 갑니까?"
   스님은 주먹을 맞대어 가슴에 대고 "오직 이 속에 있다" 하였다.
   "그 속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별로 대단할 것이 없느니라."
  
   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대단할 것 없다는 그 도리입니까?"
   스님은 눈을 똑바로 뜨고 뚫어지게 보면서, "내가 그대를 볼 때 무슨 대단한 일이 있는가" 하였다.
  
   또 한 스님이 병들지 않는 자의 화두(不病者話)를 들어 거론하자, 스님은 꾸짖는 투로 "왜 그런 것을 묻는가" 하고는 이내 대중에게 말하였다.
   "노승은 오늘 그대들을 위해 열반 불사를 지어 마치리라."
   그리고는 진시(辰時)가 되어 고요히 돌아가시니 5월 15일이었다.
  
   여흥과 도안의 두 관리가 모시고 앉아 인보(印寶)를 봉하였는데 스님의 안색은 보통 때와 같았다. 여흥 군수가 안렴사(按廉使)에게 알리고 안렴사는 조정에 고했다.
   스님이 돌아가실 때, 그 고을 사람들은 멀리 오색 구름이 산꼭대기를 덮는 것을 보았고, 또 스님이 타시던 흰 말은 3일 전부터 풀을 먹지 않은 채 머리를 떨구고 슬피 울었다. 화장을 마쳤으나 머리뼈 다섯 조각과 이 40개는 모두 타지 않았으므로 향수로 씻었다. 이때에 그 지방에는 구름도 없이 비가 내렸다. 사리가 부지기수로 나왔고, 사부대중이 남은 재와 흙을 헤치고 얻은 것도 이루 셀 수 없었다. 그때 그 고을 사람들은 모두 산 위에서 환히 빛나는 신비한 광채를 보았고, 그 절의 스님 달여(達如)는 꿈에 신룡 (神龍)이 다비하는 자리에 서려 있다가 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습은 말과 같았다. 문도들이 영골사리를 모시고 배로 회암사로 돌아가려 할 때에는 오래 가물어 물이 얕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비는 오지 않고 갑자기 물이 불어 오랫동안 묶여 있던 배들이 한꺼번에 물을 따라 내려갔으니, 신룡의 도움임을 알 수 있었다.
   29일에 회암사에 도착하여 침당(寢堂)에 모셨다가 8월 15일에 그 절 북쪽 언덕에 부도를 세웠는데, 가끔 신령스런 광명이 환히 비쳤다. 정골사리 한 조각을 옮겨 신륵사에 안치하고 석종(石鍾)으로 덮었다.
  
   스님의 수(壽)는 57세요 법랍은 37세였으며, 시호는 선각(禪覺) 이라 하였다. 그 탑에는 "□□스님은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산승은 문자를 모른다' 하였다. 그러나 그 가송(歌頌) 과 법어(法語) 는 혹 경전의 뜻이 아니더라도 모두 아주 묘하다"라고 씌어 있다.
   이제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어 이 세상에 간행하게 되었으니, 스님의 덕행은 진실로 위대하다. 실로 이 빈약한 말로 전부 다 칭송할 수 없지만, 간략하게나마 그 시말(始末)을 적어 영원히 전하려는 것이다. 삼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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