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고려 보제선사 1) 이상국에게 답함

   이미 일찌기 "無" 자 화두를 들었을진대 반드시 화두를 고칠 것이 없느니라.
   더우기 다른 화두를 들어도 어느덧 "無" 자가 들린다 하니,
   이는 반드시 "無" 자에 이미 적지않이 익음이 있음이니,
   부디 뜻을 옮기지 말며 화두를 바꾸지 마라.

   다만 26시 중 4위의(行住坐臥)내에 한결같이 화두를 들지니,
   어느 때에 깨치고 못깨칠 것을 생각하지 말며
   또한 재미가 있고 없고 득력하고 득력 못하고에 개의하지 말고
   오직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분별이 끊어진 곳에 밀어대어 이르러야 하니
   이곳이 즉 제불 제조사가 신명을 버린 곳이니라.

《평》

   이 어록은 만력 정유년에 복건(福建)의 허원진(許元眞)이 동정(東征) 2) 하였을 때 조선에서 얻어온 것이라, 중국에는 아직 없는 것이기에 그 요점만을 적어서 이에 알게 한다.

▒ 용어정리 ▒

[1] 보제(普濟) :
   (1320-67) 우리나라 조도(祖道) 중흥조인 고려의 나옹(懶翁)스님이다. 위는 혜근(慧勤). 고려 충숙왕 7년에 영해에서 출생. 속성은 아(牙)씨. 사의 모 정씨 꿈에 금빛 매가 와서 그의 머리를 쪼고 알을 품에 떨어뜨리고 간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한다.
   어려서 출가하고저 하는데 부모가 허락하지 않더니, 20세에 이르러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사방에 물어 보았으나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으므로 비통한 생각이 들어 마침내 사불산 묘적암 요연(了然)스님에게 출가하였다.
   요연이 묻기를 "너 왜 머리를 깎고저 하느냐?"
   "삼계를 뛰어나 중생을 이익하고져 합니다."
   "여기 온 것이 무슨 물건이냐?"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능히 왔습니다마는 보려고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공부하면 되겠습니까?"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을 찾아 물어라."
   
   이에 사는 그곳을 떠나서 여러 곳을 다니다가 1344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이르러 여기서 4년동안 주야 장좌하고 극진히 좌선하여 마침내 깨친 바가 있었다. 그후 원(元) 북경에 가서 지공(指空)스님을 찾아갔다. 지공은 서천(西天) 제108대 조사다.
   지공 묻기를
   "네가 어디서 왔느냐?"
   "고려에서 왔습니다."
   "배로 왔느냐, 육지로 왔느냐, 신통으로 왔느냐?"
   "신통으로 왔습니다."
   "신통을 나투어 보라."
   사가 차수하고 가까이 가서 서니, 다시 묻기를
   "네가 고려에서 왔다니 동해는 다 보았느냐?"
   "아니보았던들 어찌 여기를 왔겠습니까?"
   "무슨 일로 왔느냐?"
   "후대를 위하여 왔습니다." 이에 지공스님이 입실을 허락하였다.

   하루는 게송을 짓기를
"산하 대지는 눈앞의 헛꽃이요, 삼라만상이 또한 그러하네.
이제야 자성이 원래로 청정한 것을 아니,
진진찰찰(塵塵刹刹)이 법왕신이라" 하였다.

   지공이 말하기를
   "서천 20여인이나 동토 72인들이 다 지공에 있어서는 한 물건도 아닌데
   지공이 출세하여 사는데 법왕인들 어디 있으랴! " 하니,

   "법왕신이여, 삼천(三天)의 주인되고 모든 백성 이익하네.
   천검(千劍) 잡아 들고 불조를 내려치니,
   백양(百陽 - 지공의 方丈이름)이 널리 퍼져 모든 하늘을 비춘다.
   내 이제 소식을 알아 얻음에 흡사 내집의 정혼(精 魂)을 희롱함이라.
   기특하다 기특하다 크게도 기특하다.
   부상(扶桑-海東)의 일월이 서천을 비추누나!" 하였다.
   
   지공이 "애비도 개(狗)고 어미도 개고 너도 또한 개다" 하는데, 이에 사가 곧 예배하고 물러섰다.
   
   그 후 다시 게송을 짓기를
"미한 즉 산과 물이 경계가 되고, 깨친즉 온 세계가 온전히 내 몸이라,
미(迷)거니 오(悟)거니 모두 다 쳐부수니
아침마다 오경(五更)에는 닭이 우누나" 하니,

   지공이
   "나도 아침마다 새소리를 듣는다" 하고 사의 법기(法器)됨을 인정하였다.

   그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평강(平江)의 휴휴암(休休庵)과 정자선사(淨慈禪寺)를 거쳐 평산처림(平山處林)선사에게 가니, 평산은 마침 승당에 있었다.
   사가 곧장 승당에 들어가 방안을 왔다 갔다 하니 평산이 묻기를,
   "대덕은 어디에서 왔는가?"
   "대도(大都)에서 왔습니다."
   "이제까지 누구를 만났는가?"
   "서천 지공을 뵈었습니다."
   "지공의 일용이 어떠한가?"
   "하루에 천 검(千劍)을 씁니다."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너의 한 칼을 가져오라."
   사가 좌구(座具)를 들어 평산스님을 치니
   평산은 쓰러지면서 큰 소리로
   "이 도적놈이 사람을 죽인다! "하니
   사가
   "저의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하면서 부축하여 일으키니, 평산은 크게 웃으면서 사의 손을 잡고 방장으로 들어갔다.

   평산스님의 법의를 받아가지고 보타낙가산 등 여러 곳을 지나 고목영(枯木榮)선사에게 갔는데 한참만에 고목이 말하기를
   "수좌는 좌선할 때 어떻게 용심하는가?"
   "가히 쓸 마음이 없습니다."
   "이미 마음이 없을진대 12시 중에 누가 너를 가져 운동하는가?"
   사가 눈을 들어 바로 쳐다보니, 고목이 말하기를
   "그것은 부모가 낳은 눈이 거니와 부모가 낳기 전에는 무엇으로 보는가?" 하자,
   사가
   "엑!" 한 할하고 "무슨 낳고 안 낳고를 말하는거요?" 하니,
   고목이 사의 손을 잡으면서
   "누가 고려가 바다 건너에 있다하랴!" 하는 것을
   손을 뿌리치고 나와 복룡산(伏龍山) 천암장(千巖長)선사에게 갔다.
   
   마침 그때는 강호선객 천여명이 모였었다.
   천암이 묻기를
   "대덕은 어디서 왔는가?"
   "정자(淨慈)에서 왔습니다."
   "부모가 낳기 전 어디서 왔는가?"
   "오늘 아침이 4월 2일입니다."
   "눈 밝은 사람은 속일 수 없구나!" 하고 입실을 허락하였다.

   여기서 한여름을 지내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지공의 법의와 불자를 전해받고, 공민왕 7년에 귀국하여 여러 곳에 있으면서 가는 곳마다 크게 종풍을 현양하였다. 공민왕이 청하여 내전에서 법요를 듣고 신광사에 있게 하였고, 공민왕 20년에는 왕사가 되고 대조계선교도 총섭근수본지 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大曹溪禪敎都總攝勤修本智 重興 祖風福國佑世 普濟尊者)라 호를 받았다. 희암사를 크게 중건하고, 고려 우(禑)왕 2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

   임종을 당하여 한 중이 묻기를
   "이 때를 당하여 어떠합니까?" 하니,
   사가 주먹을 번쩍 들어 보였다.
   다시 묻기를
   "사대가 각각 헤어지니 어느 곳을 향하여 가시렵니까?"
   "따로 기특한 도리가 없다"
   "어떠한 것이 기특한 도리입니까?"
   사 눈을 들어 중을 바로 쳐다 보면서
   "내가 너와 만났을 때 무슨 기특한 것이 있느냐!" 하고 대중을 불러서
   "너희들은 제각기 잘 공부지어가라. 노승은 오늘 너희들을 위하여 열반불사를 지어 마쳤다" 하고 조용히 시적하였다.
   향수 57세. 시호는 선각(禪覺)선사. 사리를 나누어 신륵사와 희암사에 부도를 세워 봉안하였다.

[2] 동정(東征) :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이 우리나라에 출동하였던 것을 말한다. 만력 정유는 선조 30년, 왜군이 제차 침공하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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