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면 앞 생각(前念)이 나지 않고 뒷 생각(後念)이 이어지지 않는다. 앞 생각의 활동(業)이 없어지는 것을 중생을 제도했다고 한다. 앞 생각에 성을 내면 기쁨이라는 약으로 치료하니, 그것을 부처님이 계셔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모든 말씀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니 병이 같지 않으므로 약도 다르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부처님이 있다 하고 어떤 때는 부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실다운 말로 병을 다스려 차도가 있으면 낱낱이 실다운 말이지만 차도가 없으면 그 모두가 허망한 말이다. 그러나 실다운 말이 견해를 내면 망령된 말이 되고, 망령된 말이 중생의 전도를 끊으면 실다운 말이 되니 병 또한 허망하여 허망과 약이 서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신 9부교(九部敎)의 말씀은 방편교설(不了義敎)이다.

   성냄과 기쁨, 병과 약이 그대로 자기라서 다시는 두 사람이 없는데, 어느 곳에 세간에 출현하는 부처가 있으며 어느 곳에 제도할 중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經)에서도 '멸도(滅度)를 얻은 중생은 사실 없다'고 하였다. 또는 '부처와 보리를 좋아하지 않고 유·무 모든 법에 집착하고 물들지 않음을 남을 제도한다(度他)하고, 자기를 고집하여 머물지 않음을 자기를 제도한다(自度)'고 하였다.

   병이 같지 않기 때문에 약도 다르고 처방도 다르니 한 쪽으로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부처와 보리 등의 법에 의지하면 모조리 일정한 방향에 의지함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에 있어서는 한결같지 않다'고 하였던 것이다.

   경전에서는 그것을 노란 잎사귀를 돈이라고 속이고 빈주먹 속에 있다고 속여 어린 아이를 달래는 비유를 들어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이 이치를 모르니 그것을 무명(無明)과 같다고 한다. '반야를 행하는 보살은 내 말에 집착하거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는다'하였다. 성내는 마음은 돌덩이 같고 애욕은 강물과 같다. 지금 성내는 마음과 애욕만 없다면 산하석벽을 꿰뚫고 당장 귀머거리 속인 병을 다스리며 다문변설(多聞辯說)로 눈병을 다스릴 것이다.

   사람이 부처가 되면 얻었다(得)하고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지면 잃었다(失)한다. 옳다(是) 그르다(非)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