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이 한 몸(三身一體)이며, 한 몸이 삼신(一體三身)이다.

   첫째는 법신실상불(法身實相佛)로서 법신불은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니 밝음과 어둠은 허깨비의 변화에 속하는 것이다. 실제의 모습(實相)은 헛것(虛)을 상대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본래 이름이란 없는 것이다. '부처님 몸은 함이 없어(無爲) 어떤 테두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한 것과도 같다.
   성불하여 일신을 공양하는 등은 한 됫박 한 홉 들이쯤 되는 말이다. 요컨대 탁함을 상대로 맑음을 가려내 붙인 이름이므로 '실상법신불'이라 한 것이다. 또한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라 이름하며, 허공법신불, 대원경지(大圓鏡智:제 8식의 전변), 제8식(第八識), 성종[性宗: 차별상을 중심으로 일체법을 설하는 상종(相宗)에 대해 평등하고 진실된 성품을 설하는 종지], 공종[空宗: 상(相)을 부정하여 일체법의 실상인 공(空)을 설하는 종지. 중국에서는 유종(有宗)과 공종(空宗), 혹은 상종(相宗)과 성종(性宗)으로 제교(諸敎)를 분류해 왔는데 유종, 상종에는 소승과 유식, 공종, 성종에는 삼론종, 화엄종 등이 있다.],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불국토, 굴속에 있는 사자, 금강후득지[金剛後得智; 금강정(金剛定)을 얻은 뒤 다시 차별지를 써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의 지혜], 무구단(無垢檀), 제일의공(弟一義空), 현묘한 종지(玄旨)라 이름 붙이기도 한다.
   삼조(三祖)께서 말씀하시기를,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생각만 고요히 한다'고 하였다.

   두번째 보신불(報身佛)로서 보리수 아래의 부처님이다. 또는 환화불(幻化佛)이라고도 이름하며, 상호불(相好佛), 응신불(應身佛), 원만보신노사나불, 평등성지[平等性智:제7식의 전변], 제7식(第七識), 인과에 응하는 부처님(酬因答果佛)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52선나수(五十二禪那數)와 같고, 아라한, 벽지불, 모든 보살과 같다. 또한 생멸 등의 괴로움을 받는 것도 똑같지만 중생이 업에 매어 고통을 받는 것과는 다르다.

   세번째는 화신불(化身佛)로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아무런 집착과 물듦이 없으며, 물들음이 없다는 것마저 없다. 4구(四句)를 벗어나 훌륭한 말솜씨를 갖추셨으니 화신불이라 이름한다. 이 분이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며, 대신변(大神變)이며, 유희신통(遊戱神通), 묘관찰지[妙觀察智:제6식의 전변], 제6식(第六識)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공양하면 3업(三業)이 청정해져서 전(前際)에도 끊을 번뇌가 없었고, 지금(中際)도 지킬 자성이 없으며, 뒤(後際)에도 이룰 부처가 없다. 이렇게 3제(三際)가 끊겼고, 3업(三業)이 청정하며, 3륜(三輪)이 공적하고, 3단(三檀)이 공(空)하다, 무엇을 '비구가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신다' 하는가? 6근(六根)에 번뇌(漏) 없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장엄하다고도 하는데, 모든 번뇌가 빈(空無)것을 수풀과 나무로 장엄했다 하며, 모든 물듦이 빈 것을 꽃과 열매로 장엄했다 하는 것이다.
  
   빈(空無) 불안(佛眼)으로 수행인을 파악하고 법안(法眼)으로 청탁을 분별하면서 청탁을 분별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그것을 눈 없는 데(無眼)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보적경(寶積經)」에서는 '법신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것으로는 구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색(色)이 없기 때문에 육안(肉眼)으로 볼 것이 아니며, 망정이 없으므로 천안(天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모습을 떠났으므로 혜안(慧眼)으로도 볼 수 없고, 모든 행(行)을 떠났으므로 법안(法眼)으로 볼 것도 아니며, 모든 식이 떠났으므로 불안(佛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부처의 생각(佛見)이라고 한다. 색(色)은 색이나 형색(形色)이 아님을 진색(眞色)이라 하며, 공(空)은 공이나 창공(太虛)이 아님을 진공(眞空)이라 하나, 색과 공도 또한 약과 병이 서로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법계관(法界觀)에서는 '색(色)에 즉하지 않았다느니 할 수 없으며, 공(空)에 즉했다느니 공에 즉하지 않았다느니 할 수도 없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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