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단박에 깨치려 하는가. 사람(人)과 법(法)을 동시에 딱 끊어 비우고(空), 3구(三句) 밖으로 꿰뚫어야 하니, 그것을 '온갖 테두리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사람'이란 믿음이며, '법'이란 계율·보시·지혜(聞慧) 등이다. 보살은 차마 성불하지 않고 차마 중생이 되지도 않으며, 차마 계율을 지니지도 않고 차마 파계를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지키지도 않고 범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지(智)는 흐리고 관조(照)는 밝으며, 혜(慧)는 맑고, 식(識)은 탁하다. 부처로 말하자면 관조하는 지혜(照慧)라고 하며, 보살이면 지(智)라 하고, 이승과 중생 쪽으로 치면 식(識) 또는 번뇌라고 한다.

   부처라는 결과 속에는 중생이라는 원인이 들어 있고 중생 원인 속에도 부처라는 결과가 들어 있다. 부처에게 있어서는 법륜을 굴린다(轉法輪)하고, 중생에게 있어서는 법륜이 구른다(法論轉)하고, 보살에 있어서는 영락장엄구(纓珞莊嚴具)라 하고, 중생에게 있어서는 오음총림(五陰叢林)이라 한다.

   부처에게 있어서는 본지무명(本地無明)이라 하는데, 이는 무명의 밝음(無明明)이다. 그러므로 '무명이 도의 바탕이 된다'하였으니, 어둡게 가리운 중생의 무명과는 다르다. 저것(彼)은 객관이고 이것(此)은 주관이며, 저것은 들리는 것(所聞)이고 이것은 듣는 것(能聞)이다. 그것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不一不異), 아주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으며(不斷不常),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來不去). 살아 있는 말(生語句)이며, 틀을 벗어난 말 (出轍語句)로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며,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다 이와 같다.

   온다 간다, 단멸(斷滅)이다 영원하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은 죽은 말이다. 두루하다 두루하지 않다, 같다 다르다, 단멸이다 항상하다 하는 등은 외도의 설이다. 반야바라밀은 자기 불성인데 마하연(摩詞衍)이라고도 한다. 마하(摩詞)는 크다는 뜻이고, 연(衍)은 수레(乘)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자기의 지각(知覺)을 지켜 머물면 또한 자연외도(自然外道)가 된다. 지금의 비추어 깨달음(鑑覺)은 지킬 필요가 없으며, 따로 부처를 구할 것도 없다. 따로 구한다면 인연외도(因緣外道)에 떨어진다.
  
   이 땅의 초조(初祖)께서는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르다 할 것도 있게 된다'고 하셨다. 어떤 것을 귀중하게 여기면 그것에 혹하게 되니, 믿으면 믿는데 혹하고 믿지 않으면 비방을 이룬다. 그러므로 귀하다 귀하지 않다 하지말고, 믿는다 믿지 않는다 하지도 말라.

   부처님은 무위(無爲)도 아니다. 무위가 아니라 해서 허공과 같은 적막함도 아니다. 또한 부처님은 허공같이 큰마음을 가진 중생(大心衆生)으로서 비추어 깨달음이 많다. 비록 많다고는 하나 그 비추어 깨달음은 청정하여 탐내고 성내는 귀신이 그를 붙들지 못한다.

   부처님은 온갖 번뇌를 벗어난 분으로 털끌 만큼의 애욕과 집착이 없으며, 애욕과 집착이 없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니, 이를 6도만행(六度萬行)을 빠짐없이 갖추었다고 한다. 장엄구(莊嚴具)가 필요하다면 갖가지가 다 있으며, 필요치 않아서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잃지 않는다. 이렇게 인과와 복지(福智)를 자유롭게 부린다. 이는 수행이며 수고롭게 일을 하며 무거운 짐을 진 것은 아니데, 이를 수행이라 부른다 해도 도리어 이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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