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물었다.
   "이십년 동안을 항상 '똥을 치우라'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지견을 쉬고 모든 탐욕을 쉬어 낱낱이 3구(三句) 밖으로 뚫고 지나면 이를 '똥을 치웠다'고 한다. 부처와 보리를 구하며,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구하면 그것은 똥을 퍼 들여오는 것이지 똥을 퍼낸다고 하지는 않는다. 부처라는 견해를 지어내 볼 것이나 구할 것, 집착할 것이 있다 하면 '희론의 똥'이라 하며, '거친 말', '죽은 말'이라 한다. 마치 '큰 바다는 죽은 시체를 잠재우지 않는다' 한 말과도 같다.
   부질없이 지껄이는 말을 '희론'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청(淸)·탁(濁)을 분별하면 그것을 '희론'이라 한다.
  
   경전에서는 모두 스물 한 가지 공(空)으로 중생의 티끌 번뇌를 닦아 없애준다고 한다. 또한 사문이 재계(齋戒)를 지키고, 인욕과 화합을 닦으며 자비희사(慈悲喜捨)하는 것은 일상적인 승가의 법도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완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니 탐착으로 의지하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 부처나 보리 등의 법을 얻고자 하는 자는 손을 불에 갖다대는 것이다.

   문수보살은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기만 하면 자기를 다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부처님 앞에서 칼을 빼어들었고, 앙굴마라는 부처님에게 칼을 들이댔던 것이다. 저 '보살은 5무간업(五無間業)을 지어도 무간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 말씀과도 같다. 그들 보살은 원통(圓通)으로 빈틈없으니 5역죄(五逆罪)로 빈틈없는 중생의 그것과는 다르다.

   파순으로부터 부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진 기름때를 털끌만큼도 갖지 않는다 해도 그런 데에 의지하여 집착하면 '이승의 도'라 한다. 하물며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이해한다 하며 논쟁과 승부 다투는 말을 하는 경우이겠는가. 이들은 논쟁승(論爭僧)이지 무위승(無爲僧)은 아니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탐착하여 물들지 않으면 이를 남이 없음(無生)이라 하며, 바른 믿음(正信)이라고도 한다. 일체법을 믿고 집착하면 '믿음을 갖추지 못했다'하며,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다', '치우쳐서 고르게 믿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를 일천제(一闡提:성불할 종자가 없는 중생)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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