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렇게도 말하였다.
   "실각(失脚)해서 전륜왕(轉輪王)이 되면 4천하(四天下) 사람들에게 하루에 10선(十善)을 행하게 하나 그 복과 지혜는 자기를 비추어 깨닫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을 왕이 될 인연이라 하나. 유·무 모든 모든 법에 반연하고 집착함을 전륜왕이라 하는 것이다. 지금 가슴속으로 유·무 등 모든 법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아서 4구(四句) 밖으로 벗어남을 비었다(空)고 한다. 공(空)을 불사약(不死藥)이라고도 하는 것은 죽은 왕(前王)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불사약이라고는 하나 왕과 함께 복용하니 두 가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 가지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다 둘이다 하는 생각을 내면 역시 전륜왕이라 할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복과 지혜와 네 가지 물건(四事:의·식·주·약)으로 4백만억 아승지 세계의 6취4생(六趣四生)에게 공양하여 꼬박 80년을 그들의 바램을 들어주고는 뒤에 생각하기를, '그러나 이 중생들은 모두가 노쇠하였으니 불법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게 하고 아라한도(阿羅漢道)까지도 얻게 하리라'한다 하자. 중생에게 즐겁게 하는 것만을 베푼다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하물며 수다원과와 아라한도를 얻게 한 이 시주(施主)의 무량무변한 공덕에랴. 그러나 50번째 사람이 경전을 듣고 따라서 기뻐한(隨喜) 공덕만은 못한 것이다. 보은경(報恩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마야부인은 5백의 태자를 낳아 그들 모두 벽지불과( 支佛果)를 얻었는데 멸도(滅度)하고는 각각 탑을 세워 공양하고 낱낱에게 예배하며 찬탄하였다. 그러나 위없는 보리를 얻을 자식 하나 낳아서 내 마음(心力) 더느니만은 못하다."

   지금 백천만 대중 가운데서 체득한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 가치는 삼천 대천 세계와 맞먹을 만하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이치를 깊이 깨달으라고(玄解) 늘 대중에게 권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이치가 현묘하여 복과 지혜를 부릴 수 있다면 마치 높은 사람이 천한 사람을 부리는 것과도 같으며, 머물지 않는 수레와도 같다.

   그런데 이것을 붙들고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면 '상투 속의 구술'이라 하며, 또는 '값을 매길 수 있는 보배 구슬'이라 하며, 또는 '똥을 퍼 들여온다'고도 한다. 이것을 붙들고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왕의 상투 속에 있는 밝은 구슬을 그에게 주는 것과도 같으니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라 하며, 또는 '똥을 퍼냈다'고도 한다.

   부처님은 속박을 벗어난 사람인데도 도리어 얽매임 속으로 와서 이렇게 부처가 되셨다. 또한 생사 저쪽 사람이며, 현묘하게 끊긴 저쪽 사람인데도 이쪽 언덕으로 돌아와 이렇게 부처가 되셨다. 그러나 사람과 원숭이는 함께 가지 못하는 법이니, 여기서 사람은 10지(十地)보살을 비유하고 원숭이는 범부를 비유한 것이다.

   경전을 읽어 알고자(知解)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3승교를 이해하여 영락의 장엄구를 훌륭히 얻고 32상의 굴택(窟宅)을 얻는 것으로 부처를 찾는다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소승의 3장학(三藏學)을 탐착하는 자와는 가까이 하지도 말라"하였는데, 하물며 스스로 그러는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그는 파계한 비구이며 이름뿐인 아라한(名字羅漢)으로서, 『열반경』에서는 16악율의(十六惡律義)에 넣고 있다. 그것은 물고기를 사냥하며 이익을 위해 고의로 살생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대승방등(大乘方等)은 감로수 같기도 하고 독약 같기도 하니, 없애버릴 수 있다면 감로 같고, 없애버리지 못하면 독약과 같다.

   경전을 읽으면서 저 생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 의미를 꿰뚫지 못할 것이니, 아예 읽지 않는 것이 휠씬 낫다. 한편으로는 경전도 읽고 선지식도 참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안목을 갖춰 그 생사라는 말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명백하게 분별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꿰뚫지 못할 것이어서 비구라는 속박만 가중될 뿐이다.

   그러므로 교학에서 현묘한 종지를 배운 사람은 문자를 읽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치 '자체(體)는 설명하여도 모습(相)은 설명하지 않으며, 의미는 설명해도 문자는 설명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도 같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진실한 말'이라 하며, 문자를 설명하면서 모조리 비방이라 한다면 그것을 '삿된 말'이라 한다. 보살의 설명은 법다워야 하니, 그래야 '진실한 말'이라 할 것이다.

   중생들에게 마음(心)은 지키게 하되 현상(事)에는 매달리지 않게 해야하며, 실천(行)은 하게 하되 이론(法)을 붙들지는 않게 해야 한다. 사람을 설명해야지 문자를 설명해서는 안되며 의미를 설명해야지 문자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

   '욕계에는 선(禪)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 역시 두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욕계에는 선(禪)이 없다'고 말했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색계(色界)에 이룰 수 있을까. 먼저 발심 수행의 단계[因地]에서 두 가지 정(定)을 익혀야 뒤에 초선(初禪)의 유상정(有想定)과 무상정(無想定)에 이를 수 있다. 유상정은 색계사선(色界四禪) 등의 하늘에 태어나고, 무상정은 무색계사선(無色界四禪) 등의 하늘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욕계에는 선이 없음이 분명하며 선은 색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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