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말씀하셨다.
   "그대들 스스로는 평등하고 말도 평등하듯 나도 그러하며 불국토 하나 하나마다 소리·냄새·맛·촉감 등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다. 이로부터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오르기까지 가로 세로가 모두 이와 같다. 처음 안 것을 붙들고 깨달았다(解)고 한다면 그것은 '정결(頂結)'또는 '정결에 떨어졌다(墮頂結)'고 한다. 그것은 모든 번뇌의 근본으로 스스로 지견(知見)을 내어 밧줄도 없이 자기를 결박하기 때문이다. 알 대상에 일부러 얽매여 25유(二十五有)의 세간이 있게 되면, 다시 일체 번뇌문을 흩어 다른 사람을 결박한다. 여기서 처음 안다 한 이승의 견해를 '이염식(爾 識)'또는 '미세한 번뇌'라 한다. 바로 이것을 끊어 없애고 나면 '정신을 돌려 공(空)의 소굴에 안주한다'하며, '삼매의 술에 취한다'고 한다. 또한 '해탈 마군에게 결박되어 세계의 생성과 파괴가 좌우되는 정력(定力)이 다른 국토로 새어나가도 전혀 느끼거나 알지 못한다'하며, '두려워할 해탈의 깊은 구덩이'라 하여 보살은 모두가 이를 멀리 여윈다.

   경전을 읽고 교학을 공부하며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필연코 자기에게로 환원되어야 한다. 모든 말씀은, 지금의 비추어 깨닫는(鑑覺) 성품이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경계에 휩쓸리지 않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그대들 여러 스님네가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경계에 붙들려 있음을 반조(返照)해 본다면 그것은 금강의 지혜(金剛智)로써 자유롭게 홀로 설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줄 알지 못한다면 12부경을 다 외워낸다 해도 증상만(增上慢: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착각하는 자만심)을 이룰 뿐이어서 부처님을 기만하는 것이지 수행이랄 수 없다. 모든 색과 소리를 떠나고, 떠났다는 그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안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아야 수행이랄 수 있다.

   경전 읽고 교학을 공부하는 것은 세속의 입장에서라면 훌륭한 일이겠지만 이치를 밝힌다는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이니, 10지 수행인도 벗어나지 못하고서 생사 강물에 들게 되는 것이다. 3승교(三乘敎)는 다만 탐내고 성내는 등의 병통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그 의미를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다. 이해가 탐욕이 되고 탐욕은 다시 병통이 되기 때문이다.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떠나고 떠났다는 그것에서도 떠나 3구 바깥으로 철저히 벗어나면 저절로 부처와 다를 것이 없다. 자기가 부처인데, 부처가 되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그저 부처 아닌 것이 근심일 뿐이다.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에 얽매이면 자유롭지 못하다. 이치를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복과 지혜부터 갖추면 복과 지혜에 실려 다니는 것이 마치 천민이 높은 분을 부리는 꼴이 되니, 우선 이치를 확실히 안 뒤에 복과 지혜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복과 지혜를 갖추려 하는가. 그때 그때마다 금을 흙으로 만들고 흙을 금으로 만들며, 바닷물을 소락( 酪)으로 변화시키고 수미산을 쪼개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사해바닷물을 움켜서 한 터럭에 넣으며, 하나의 의미에서 무량한 의미를 내고, 무량한 의미에서 하나의 의미를 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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