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처음선[初善]·중간선[中善]·마지막선[後善] 세 구절로 연결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에게 좋은 마음을 내도록 하는 것이며, 중간엔 좋다는 마음마저 타파해야 하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마지막 선이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보살은 보살이 아니니, 그래서 보살이라 한다", "법은 법이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다"라 하니, 같은 말이다. 여기서 한 구절만을 설명하면 중생들은 지옥에 빠지며, 세 구절을 한꺼번에 설명하면 스스로 지옥에 들어갈 것이니, 그것은 부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 된다.

   지금의 '비추어 깨달음'이 자기 부처라는 것까지 설명하면 처음선(初善)이며, 지금은 '비추어 깨달음'에 붙들고 머물지 않는다면 중간선(中善)이며, 붙들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이는 마지막선(後善)이다. 이상과 같다면 연등부처의 뒷 부처에 속하니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처는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라고 잘못 말하지 말라.

   이 땅의 초조(初組)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하는 것도 없고 성스러움도 없어야 성스러운 부처님이다."하고 하셨다. 여기서 성스러운 부처란 9품(九品)의 망상꾸러기(精靈)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용·축생 등의 부류와 제석범천 이하 모든 것들은 다 신통변화를 부릴 수 있고, 상품(上品)의 정령도 백겁 고금의 일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찌 그들을 부처라 하겠는가. 저 아수라 왕은 수미산 두 개와 맞먹을 정도로 몸이 매우 크다. 그러나 제석천과 싸울 때에야 힘이 그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연뿌리 구멍으로 들어가 숨는다. 그들의 신통변화와 변재가 적은 것은 아니나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할 수는 없으니 절차와 등급이 느슨하여 오르고 내림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를 탐진(貪瞋)이라 하고, 깨닫고 나면 부처님의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옛날과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옛날 하던 것(行履處)과 다를 뿐이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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