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추어 깨달아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과 세간·출세간법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부처이고 관조하는 작용은 바깥 경계[客塵]에 속하는데 파도로 물을 설명하듯 만상을 관조하고도 한 일이 없다. 이렇게 고요함과 동시에 관조하면서도 현묘한 이치라고 자처하지 않으면 자연히 고금을 관통할 수 있다. 그래서 "신령함은 관조하는 일(功)이 없으나 지극한 효험(功)이 항상 있어서 어디서든 부처님(導師)이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중생의 분별하는 성품(性識)은 한번도 부처님의 단계를 밟은 적이 없기 때문에 끈끈하게 집착하는 성품으로 때때마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집착한다. 그들은 잠깐 묘한 이치를 맛보아도 약이 되지 못하며, 잠깐 틀을 벗어난 도리를 들어도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49일을 말 없이 사유(思惟)하셨다.

   지혜가 깜깜하여 무어라 설명하기도 어렵고 비유할 수도 없기 때문에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며,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불성이 있다고 하면 집착한다는 비방을 듣고 불성이 없다고 하면 허망하다는 비방을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불성이 있다 하면 보태는 오류(增益謗)를 범하고, 불성이 없다 하면 덜어내는 오류(損減謗)를 범하며, 불성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면 앞뒤가 안 맞는 오류(相違謗)를 범하고, 불성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하면 희론의 오류(戱論謗)를 범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중생이 해탈할 기약이 없겠고, 처음부터 말을 하면 중생이 또 말에 따라 이해를 하여 적은 데는 덧붙이고 많은 것은 덜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설법을 하지않고 빨리 열반에 들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 뒤 과거 부처님 모두가 3승법(三乘法)을 말씀하셨음을 돌이켜 생각하고는 방편설로 거짓 이름을 세웠다. 본래 부처가 아닌데 그에게 부처라 하고, 본래 보리가 아닌데 보리·열반·해탈 등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백 섬을 지고는 일어나지 못함을 알고 우선 한 되·한 홉을 지워주었으며, 궁극적인 교설은 그가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방편교설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하여 선법(善法)이 퍼져 악법(惡法)을 누르기도 하였으나 선과(善果)의 기한이 다 되면 악과(惡果)가 바로 도래하였다. 부처가 되면 중생도 나타나고, 열반에 들면 생사가 나타나며, 밝아지면 어둠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엎치락뒤치락하는 유루인과(有漏因果)로서 그것을 받기를 생각하지 않을 자가 없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거든 상대적인 개념을 끊기만 하면 되니, 어떠한 테두리도 그를 매어두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 높낮이도 없고 평등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다.

   문자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그대를 막는 양쪽 극단이 그대를 붙들지 못하여 번갈아 나타나는 고락과 엇갈리는 명암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진실된 실제 이치가 진실이 아니기도 하며 허망도 허망이 아니기도 하니, 다듬을 수 없는 허공처럼 테두리를 갖는 물건이 아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알음알이를 낼 틈을 준다면 테두리에 메이게 된다. 또한 괘(卦)의 조짐이 금·목·수·화·토에 관할되듯 아교풀이 다섯 군데를 함께 붙여 버리듯 마왕이 자유롭게 자기 집으로 붙잡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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