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편교설(不了義敎)에는 인간·천상의 스승이 있고, 부처님(導師)이 있으나 궁극적인 교설(了義敎)에서는 인간·천상에게 스승이 되지 않으며 법을 스승 삼지도 않는다. 마음(玄鑑)을 붙잡지 못했거든 우선 궁극적인 교설(敎說)에 의지해야 할 것이니 조금은 가까운 데가 있기 때문이다. 방편교설은 귀머거리 속인 앞에서나 설명하는 것이 합당할 뿐이다.

   한편 유·무 모든 법에 머물지 않고 머뭄 없는 데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그를 큰 선지식 또는 오직 한 분이신 부처님이라 한다. 이 큰 선지식에는 두 사람이 없으니 나머지는 모조리 외도이거나 마군의 말이다.

   여기서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모든 유무 대경법(對境法)을 깰 뿐이다. 탐착하고 물들지 말 것이며, 결박을 푸는 일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되니, 사람을 가르치는 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가르칠 말이 따로 있고, 사람에게 줄 법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를 외도나 마군의 말이라 한다.

   궁극적인 교설인지 방편교설인지를 알아야 하며, 생사를 말하는 것인지 약병(藥病)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반대로 비유를 든 것인지(逆喩) 유사한 비유를 든 것인지(順喩)를 알아야 하며, 총론인지 각론이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닦아서 부처가 된다",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한 것은 방편교설이고 부정논법이 아니며 총론이고 한 됫박쯤 되는 말이다. 또한 염법(染法) 쪽만을 가려 하는 말이고 유사한 비유를 드는 말이며, 죽은 말이고 범부 앞에서 하는 말이다.

   한편 "닦아서 부처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부처도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한 것은 궁극적인 교설이고 부정논법이며, 각론이고 백 섬들이 말이다. 또한 3승교(三乘敎) 밖의 말이고 반대 비유를 드는 말이며, 정법(淨法) 쪽에서 하는 말이다. 살아 있는 말이며 수행 지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다.

   수다원으로부터 곧장 10지(十地)에 오르기까지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모조리 더러운 법진(法塵)에 속하고, 번뇌 쪽에 포함되며, 방편교설에 속한다. 궁극적인 교설에서는 지키라(持)하고, 방편교설에서는 범하라(犯)하는데 부처님의 경지에는 지키고 범할 것이 없어 궁극적인 교설과 방편교설을 다 인정하지 않는다.

   싹을 보고 토질을 알아내고 탁함으로 맑음을 분별하는데, 여기서 비추어 깨닫는 것을 맑은 쪽에서 헤아려 본다면 그 비추어 깨달음은 맑음이 아니고, 비추어 깨달음 아니라 해도 역시 맑음이 아니며, 맑지 않음도 아니며, 견해(見)도 아니다. 물이 더러우면 물이 더럽다고 말하나 물이 맑으면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말을 하면 도리어 그 물을 더럽히는 것이다.

   묻지 않는 물음도 있고 설명 없는 설명도 있다. 부처는 부처를 위해 설법하지 않으니 평등한 진여법계(眞如法界)에는 부처가 없고, 중생을 제도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부처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참다운 복전(福田)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주관인지 객관인지 그 말을 가려내야 한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법(境界法)에 탐착하고 물들어 그 경계에 혹하면 자기 마음이 마왕이며, 관조[照]하는 작용[用]이 마군의 백성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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