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10대제자(十大弟子) 사리불(舍利弗)·부루나(富樓那)와 바른 믿음을 가진 아난(阿難)·삿된 믿음을 가진 선성(善星) 등은 저마다 본보기나 법칙이 있었는데, 모두들 부처님에게 설파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팔만겁을 선정에 머무는 사선팔정(四禪八定)의 아라한은 아니었으나 행할 바를 의지하고 집착하여 정법(淨法)이라는 술에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성문인(聲聞人)의 불법을 들으면 위없는 도를 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고 그래서 선근(善根)을 끊은 불성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며, 경전(敎)에서는 이를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는 두려워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한 생각 마음이 물러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쏜살같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물러난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물러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문수·관음·세지 등이 수다원(須陀洹) 지위로 되돌아와 같은 부류가 되어 이끌어 주는 경우를 물러났다 할 수는 없으니, 그런 상황을 수다원이라 부를 뿐이다.
비추어 깨달아(鑑覺) 유·무 모든 법에 매이지 않고 3구(三句)와 맞고 안 맞는 모든 경계를 꿰뚫으면 백천만억의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였다는 소문을 듣는다 해도 듣지 못한 듯하고, 그 듣지 않는다는 것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 이런 사람을 두고 물러났다 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도 매어 둘 수 없는데 이를 "부처님은 늘 세간에 계시면서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부처님이 법륜 (法輪)을 굴리느라 물러난다고 해도 불·법·승(佛法僧)을 비방하는 것이며,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지 않아 물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조법사(肇法師)가 말씀하시기를, "보리의 도는 재볼 수 없음이 위없이 높고 끝없이 드넓으며 끝없이 깊숙하여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말을 하면 살받이가 되어 화살을 부르는 꼴이다." 라고 하였다.
비추어 깨닫는다(鑑覺) 할 때, 그것은 더러움에 대한 깨끗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 비추어 깨닫는 것이 그런 것이라 인정한다면 비추어 깨닫는 것 바깥에 따로 무엇이 있어 모조리 마군의 말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비추어 깨닫는다는 것을 붙들고 머문다면 그것은 마군의 말과 같으며, 자연외도(自然外道)의 말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추어 깨닫는다는 것이 자기 부처라 해도 그것은 짧은 말이며 헤아리는 말이니 여우 울음소리와도 같아서 오히려 끈끈하게 달라붙는 집착 쪽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