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알음알이로 나타난 경계를 형상화하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된 어떤 이들은 마치 눈앞에 어른어른하게 무엇인가가 있는 듯한 것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이 어릿어릿한 것에다가 계속 의심을 붙여가면서 이제는 눈앞에 마주 선 말뚝처럼 확연하게 형상화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는 법신 도리를 터득했고 법신의 성품을 보았노라” 하며, 이러한 형상들이 괜히 자기 눈을 눌러서 나타난 헛것임을 모르고 있다. 이런 사람은 온몸 그대로 병통이지 선은 아니다.
   만약 진실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세계의 넓이가 한 장이면 고경도 한 장이듯 몸을 가로눕히면 온 우주를 덮어야 한다. 그 속에선 티끌 세계를 찾아볼래야 정말로 찾을 수 없다. 이런 데에서 무엇을 가지고 ‘자신’ 이다, ‘상대’ 다 하며, 또 무엇을 가지고 ‘어떤 것’ 이니 ‘어른어른하다’ 느니 하겠는가? 운문스님께서도 역시 이러한 병통을 지적하셨으니, 아직까지 많은 글이 남아 있다. 만약 이 한 가지 병만 밝혀낼 수 있으면, 다음 세 가지 병도 모두 얼음 녹듯 녹아버릴 것이다.
   나는 전에도 이렇게 납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법신 가운데 병이 가장 많이 생겨나니 반드시 큰 병을 한바탕 앓고 나야 비로소 병의 원인을 알게 된다. 가령 온 누리 사람이 다 참선을 한다 해도 이 병을 앓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아직 없었다. 오직 눈먼 사람, 귀머거리, 벙어리만이 예외일 것이다.”

7. 얻은 경계를 경론에 맞춰 이해하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되면 어떤 이들은 “온 누리가 사문의 한 쪽 눈이며 온 누리가 자기의 신령스런 마음이라 모두가 다 이 안에 있다” 고 한 장사스님의 말씀을 보게 되거나 또는 “티끌 하나 속에 끝없는 법계의 진리가 담겨 있다” 는 경전의 말씀을 끌어다가 대충 맞춰보고 만다. 그리고는 앞으로 더 나아가려 하지도 않고 살지도 죽지도 못하면서 이런 식의 이해를 깨닫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온몸 그대로가 병통이지 선은 아니다.
   설사 도리와 상응했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전적으로 도리 자체가 장애일 뿐이며, 법신 쪽에만 치우쳐 있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이 그 이해에 엉켜서 깊은 진리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마치 눌러도 죽지 않는 원숭이와 같으니 이미 죽지 않는다 했을진대, 또 어떻게 기절했다가 소생할 수가 있겠는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처음 의정이 생기거든 곧 도리와 상응하도록 할 것이며, 이미 그렇게 되었거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만길 낭떠러지에서 곤두박질을 쳐 떨어진 뒤 팔을 저어 장강을 벗어나야만 비로소 도인의 공부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헛다리 짚는 놈이니 종문(宗門)을 떠맡을 납자가 아니다.

8. 담담한 경계를 궁극적인 깨달음이라 여기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된 어떤 이는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마치 햇빛이나 등불 그림자 속에 있는 듯 아무 맛도 없는 담담한 경계에 빠진다. 혹은 다시 모두 놓아버리고 맑은 물 영롱한 구슬이나 맑은 바람 밝은 달과 같은 경계에 앉게 된다. 이렇게 되고 나면 자기 자신과 바깥 세상을 몽땅 뭉쳐서 한 조각으로 만들고, 그 청정하고 날카로운 상태를 궁극적인 경지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몸을 돌려 숨을 쉬지도 않고, 더이상 망념을 떨쳐버리려 하지도 않으며, 선지식에게 인가를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깨끗한 경계 속에서 또 다른 생각을 일으키면서 그것을 깨닫는 방편이라고 여기니, 이런 사람은 온몸 그대로가 다 병통이지 선은 아니다.
   천동사(天童寺) 정각(正覺)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맑은 빛이 눈에 비추어도 마치 길 잃은 사람 같고, 분명하게 몸을 돌렸지만 오히려 지위에 떨어졌다.” 자못 밝은 빛이 눈에 들어온다면, 그것을 어찌 맑은 물이나 영롱한 구슬, 맑은 바람이나 밝은 달 같은 경지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또한 분명히 ‘몸을 돌렸다’ 함은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여기서 ‘길을 잃었다’ 함과 ‘지위[位]에 떨어졌다’ 는 그 말을 도장찍듯 확실히 소화해 내면 된다. 납자들이 이 경지에 도달하면 다시 어떻게 닦아가야 하는가. 반드시 크게 탈바꿈하여 석존처럼 꽃 한 송이 집어든 장육금신(丈六金身)의 부처가 되어 씀씀이에 분수 밖의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는 말뚝에 매어둔 채 노만 흔들리며 어부는 집안에 들어앉은 격이 된다. 이런 이를 ‘혈기 없는 사람’ 이라고 하니 아무리 많이 때려죽인다 해도 무슨 죄가 되겠는가?

9. 신기한 경계에 현혹되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되면 어떤 이들은 무엇이나 된 듯 여긴다. 빛이나 꽃이 보이고 여러 가지 신기한 모습이 나타나면 자기가 성인(聖人)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런 신기한 모습으로 사람을 현혹시키면서 스스로는 확실히 깨달았노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전부 병통이지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경계로 나타나는 신기한 모양은 자기 망심이 맺혀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고, 혹은 마가 틈을 타고 들어와서 그런 경계를 짓는 수도 있고, 혹은 제석천신이 변화해서 수행인을 시험해 보느라 나타나는 수도 있다. 망심이 맺혀 그런 경계가 나타나는 경우는 정토수행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상을 관함에 오직 그것만을 염두에 둔다. 그러다가 홀연히 부처나 보살 등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16관경(十六觀經)』에 설해진 내용은 모두 정토교의 이론과는 맞으나 참선의 요문(要門)은 아니다. 마가 틈을 타고 들어오는 경우는 『능엄경』에 나오는 예를 들 수 있다. 오온이 빈 가운데 수행하는 사람 마음에 집착이 생기면 마가 자기 마음대로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제석천신이 변화한다는 경계는, 보살이 수행할 때 제석이 머리 없는 귀신이나 내장이 없는 귀신으로 변하여 나타나는 경우이다. 이때 보살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다시 미녀의 몸으로 변하여 나타난다. 거기에도 보살이 애착심이 없으면 다시 제석으로 변하여, 절을 하고는 말한다.
태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말릴 수는 있어도
저 수행자의 마음은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수스님께서는,
   “야인이야 기량이 다할 때가 있겠지만
   노승은 어떠한 경계도 보고 듣지 않으니 끝이 없으리라” 하셨다.

   진정한 납자라면 백 개의 칼날이 눈앞에서 부딪친다 해도 딴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하물며 정을 닦는 고요한 가운데 경계로 나타난 헛된 모습에 있어서랴. 이미 법신도리와 상응하였다면 마음 바깥의 경계는 없다. 그러니 인식 주관인 마음이나 인식 대상인 경계가 어디에 설 수 있단 말인가?

10. 경안(輕安)에 집착하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되면 심신이 거뜬해짐[輕安]을 느끼고 일거일동에 모두 막히거나 걸림이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바른 도와 삿된 도가 번갈아 오는 것이니, 사대(四大)로 된 몸이 몹시 쾌적해져서 잠시 그러할 뿐이지 궁극적인 경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무지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의정을 놓아버리고 참구하려 들지 않으면서 스스로는 깨닫는 방편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번뇌가 끊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무지 모르고 있다. 설사 이들이 진리를 깨달았다 해도 그것은 알음알이일 뿐이니, 알음알이로 헤아리는 것은 온몸 그대로가 병통이지 선(禪)은 아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깨달음이 깊지 않은 데다 너무 조급하게 범부에서 성인으로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가 깊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것을 쓸 수가 없다. 그러니 활구(活句)를 얻고서 물가나 숲속에 들어가 공부한 것을 잘 간직[保任]하는 것은 좋다 하겠으나, 조급하게 앞으로 나아가 남을 위한답시고 부질없이 잘난 체해서는 안된다.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처음 공부할 때 의정이 일어나 한 덩어리로 뭉쳐지게 되면 오직 그것이 저절로 열리기를 기다려야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 조금이라도 무슨 이치를 보았다 해서 곧 의정을 놓아버리고 그 속에 눌러앉아 죽어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끝내 깨닫지 못하면 일생을 헛공부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참선하는 납자라 해도 실제로 참선한 내용은 없다.
   비록 번뇌를 떨쳐버렸다 해도 다시 선지식을 만나보는 일은 나쁠 것이 없다. 선지식이란 분들은 훌륭한 의사와 같아서 중병을 거뜬히 고쳐내고, 또 큰 공덕주여서 능히 마음 먹은 대로 베풀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이만하면 되었겠지 하는 생각으로 선지식을 만나보려 하지 않아서는 절대 안된다. 선지식을 만나보려 하지 않고 자기 견해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선 가운데 이보다 더한 병통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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