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의정을 일으킨 납자에게 주는 글

1. 조그만 경지에 집착하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法身道理)와 만나서 온 누리가 밝고 밝아 조그만큼의 걸림도 없음을 보게 되는 이가 있다. 그들은 당장에 그것을 어떤 경지라고 받아들여서 놓아버리지 못하고 법신 주변에 눌러앉게 된다. 그리하여 미세한 번뇌가 끊기지 않은 채, 법신 가운데 어떤 견지(見地)나 깨달음의 상태가 있는 듯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모두 종자 번뇌임을 까맣게 모르는 것이다. 옛사람은 이 법신을 ‘언어를 초월한 소식’ 이라고 불렀다. 미세한 번뇌가 끊기지 않았다면 이미 온몸 그대로의 병통이니, 이는 선이 아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거든 오직 온몸으로 부딪쳐 들어가서 생사대사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깨달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라야 한다.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깎아지른 절벽에서 손을 뿌리치듯 더 나아가 깨달아보려 해야 하니, 죽은 자리에서 다시 깨어나야 자기를 속이지 않는 깨달음이니라’ 라고 하였다.

   만일 번뇌가 다 끊기지 않았다면 이것은 생멸심일 뿐이며 또한 번뇌가 끊긴 뒤에도 몸을 돌려 숨을 토해낼 줄 모르면 이것을 ‘죽은 놈’ 이라 부르니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는 깨닫기가 어렵지 않은데, 이는 납자들이 선지식을 만나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선지식을 만나서 그에게서 아픈 곳을 찔리고 나면 그 자리에서 돌아갈 곳을 알게 될 것이며, 혹 그렇지 못하면 죽어 엎어진 시체가 만리에 뻗쳐 있게 될 것이다.

2. 경계에 빠져 나아갈 바를 모르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만나 세계를 뒤섞어서 파도물결이 뒤집히는 듯한 경지를 얻게 되면,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 경지에 빠져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도, 뒤로 물러서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온몸으로 부딪쳐 참구해 들어가지 못하게 되니, 이는 마치 가난한 사람이 황금 산을 만나 떠날 줄을 모르는 꼴이다. 그것이 황금인 줄은 확실히 알지만 어찌 손 쓸 줄을 모르니, 옛사람은 이런 자를 ‘보물 지키는 바보’ 라고 불렀다. 이는 온몸 그대로가 병통이지 선이 아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거든 오직 모름지기 위태로움을 돌보지 않아야 비로소 법과 상응하게 된다. 천동사 정각스님은 이런 노래를 지으셨다.

온 법계를 뭉쳐 밥을 지었으니
머리를 박고 먹어야만 진짜 배부른 식사일세.”

   이 말씀과 같이 머리를 박고 먹지 않으면 밥바구니 옆에서 굶어 죽거나 큰 바다 속에서 목말라 죽는 것과 같으니 무슨 일이 되겠는가. 이것이 깨닫고 난 다음에는 모름지기 선지식을 만나야 한다고 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들께서도 깨닫고 난 다음 선지식을 만나 완성되었다.
   만일 자기 스스로만 깨닫고 선지식을 만나서 못을 뽑고 빗장을 열듯 의문과 번뇌를 뽑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들을 모두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 이라고 부른다.

3. 경계를 헤아림에 빠지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되면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온 누리가 꽉 막혀 실오라기만한 빈틈도 없게 된다. 이런 가운데 홀연히 헤아리는 마음이 생겨서 마치 눈앞에 무엇이 가려져 있는 듯하고 심신을 가로막는 듯하여, 끄집어내려 해도 나오지 않고 쳐부수려 해도 깨지지 않는다. 문제 삼았을 때는 무엇인가 있는 듯하다가 놓아버리려 하면 아무 것도 없는 듯하여, 입을 열어도 숨을 내뿜을 수 없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발을 뗄 수 없게 되는데, 이런 경계라 해도 역시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도 온몸 그대로 병통이지 선이 아니다. 이런 이들은 옛 스님들의 바른 공부를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옛사람들은 마음씀이 한결같아서 의심이 일어나서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경지에 와서도 그것을 헤아리는 마음이나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꼿꼿하게 헤쳐나갔다. 그러다가 홀연히 어느 아침 의심 덩어리가 깨어지고 나면 온몸 그대로가 눈동자가 된다. 그리하여 산을 보니 여전히 옛산이요 물을 보니 여전히 옛물이어서 “산하대지가 어디서 왔는가!” 하고 외치게 된다.
   이때 실오라기만큼이라도 깨달았다는 자취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거든 꼭 선지식을 만나보아야 한다. 만약 옳은 스승을 만날 수 없으면 고목나무 큰 바위 앞 갈림길에 또 하나의 갈림길이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지 않고, 고목나무 뿌리에 걸려 자빠지는 꼴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박산(博山)이 그와 동참의 의를 맺겠다.

4. 쉼에 빠져 의정을 놓아버리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되면 문득 가라앉고 고요한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쉬어라, 쉬어라” 하며 만년 부동의 일념을 갖고서 의정은 법신도리 속에 모셔두고 꺼내 쓰지 않아서 오직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다시는 돌아오지도 않고 아무 것도 개의치 않으며 아무런 기척도 없이 썩은 물 속에 빠져들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그것이 최상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 역시 온통 병들어 있는 것이지 선은 아니다.
   석상스님의 문하에 이런 식으로 공부한 사람이 극히 많았으니, 그들이 비록 앉아서 죽고 선 채로 입적한다 해도 제대로 공부한 것은 아니다. 만약 따끔한 침을 맞고서 아프고 가려운 곳을 알아 몸을 놀리고 숨을 토해낼 수 있게 되면 올바른 납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픈 줄도 가려운 줄도 모르면 비록 법신이라는 말을 이해하고, 또 제자리에서 시방의 일을 훤히 안다 하더라도 무슨 수용이 있겠는가?
   정각스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였다. “앉아서 시방 일을 다 알아도 오히려 낙방이라더니 남몰래 한 발자국 옮겨놓자 비룡을 보았노라.” 옛사람들은 경책하는 법어로 크게 납자들을 가르치는 바 있었고, 이론을 펴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는 바가 있었다. 문제는 스스로가 철두철미하게 참구하려 들지 않는 데 있다. 이런 사람들이 선지식에게 도를 배워 북적대는 세상에서 천가지 백가지로 자유롭고자 하나 어렵지 않겠는가.

5. 고요한 경지에서 주재(主宰) 세우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된 어떤 이들은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마음에 아무런 장애도 겉치레도 없고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게 된다. 이들은 여기서 다 놓아버리고 지금의 경지를 바꾸어 깨달음의 기회를 잡을 줄 모른다. 오히려 그 속에서 억지로 주재(主宰)를 세워 법신 쪽에 꼭 막혀 있으니, 이는 온몸 그대로가 병통이지 선은 아니다.
   동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높은 묏부리 빼어나게 솟았으니
날으는 학은 멈출 곳을 모르고
신령한 고목 먼 곳에 우뚝하니
봉황새도 기댈 곳 없구나!
   
   여기서 ‘높은 묏부리 신령한 고목’ 은 엄청 깊숙한 경지로 무미건조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머물 곳도 기댈 곳도 없다’ 함은 너무나 생생하여 죽은 갈단 같은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잘 알아야 한다. 참구하여 깊숙한 곳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치를 깨닫는 심오한 경지를 모르고, 만일 활발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기연(機緣)을 굴리는 묘리(妙理)를 알지 못하게 된다.
   도인의 마음씀은 아무 마음 쓸 만한 곳이 없는 곳에서 마음을 쓰는 것이니, 그래야만 제대로 선지식을 만나 철통같은 의심의 응어리를 쑥 뽑아버리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러니 어찌 그루터기를 지켜 토기를 자으려는 바보처럼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으면서 새장에 갇힌 학이나 털 빠진 봉황이 되기를 달갑게 여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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