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납자에게 주는 글

1. 지식으로 헤아리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 중에는 옛 큰스님들의 행적과 저서들을 뒤적이며 이론을 검토하여 지식을 구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은 언어로 된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하나로 꿰뚫어서 도장을 하나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잣대로 삼는다. 그러다가 공안 하나라도 들게 되면 곧 알음알이로 따져 이해하려 하고 본래 참구해야 할 화두에는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남이 따져 물으면 달갑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니, 이는 생멸심이지 선(禪)은 아니다.
   혹 어떤 사람은 묻는 대로 바로 답해주거나, 손가락을 곧추 세우고, 주먹을 쳐들거나, 붓을 쥐고 일필휘지로 게송을 지어 납자들에게 보여주고 참구하도록 하면서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스스로는 확실히 깨닫게 하는 방편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모두 알음알이가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한순간에 잘못 되었음을 알려 한다면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선지식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을 찾아야 되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생멸심만 켜져가서 오래되면 마(魔)가 달라붙어 거의 구제불능이 된다.

2. 고요한 경계만을 찾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어떤 이들은 바깥경계에 대해 싫증이 나서 떠날 마음이 생긴다. 그리하여 사람 없는 고요한 곳에 즐겨 머물면서 문득 힘을 얻었다고 느끼고는 그곳에 어떤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조금이라도 시끄러운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즐겁지 않게 되니, 이것은 생멸심이지 선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오래 앉아있게 되면 고요한 경계에만 마음이 맞아 아득히 캄캄하여 아무런 지각도 상대도 없어진다. 비록 선정에 들었다 하더라도 마음이 응고되어 움직이지 않으니 소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조금만 경계인연을 만나면 곧 자유롭지 못하고, 성색(聲色)을 듣고 보게 되면 두렵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 틈을 타서 마가 침입하고, 그 마력 때문에 모든 불선(不善)을 하게 되니 일생동안 수행한다 해도 아무 이익이 없게 된다.
   이러한 병통은 모두 애초부터 잘못된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의정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여 선지식을 만나보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조용한 곳에서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설사 선지식을 만났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잘못을 뉘우치려 하지 않으니, 천불이 출세해도 어찌할 수 없다.

3. 망념으로 망념을 다스리려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알음알이를 가지고 망심을 억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망심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맑고 고요하여 마음에 티끌 한 점 없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식심(識心)의 근원은 끝내 깨뜨리지 못하고서 맑고 고요하여 티끌 한 점 없는 그 경계에서야말로 공부가 되는 것이라 이해한다. 그러다가 남에게 자기의 아픈 곳을 지적 당하면, 마치 물위에 뜬 호롱박을 자꾸만 눌러대는 꼴이 되니 이는 생멸심이지 선은 아니다.
   이러한 병통은 애초부터 화두를 참구할 적에 의정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심신을 눌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더라도 마치 돌로 풀을 눌러놓은 것과 같으며, 만일 알음알이를 끊어 단멸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단견외도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단멸 상태를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바깥 인연을 만났을 때 다시 식심을 끌어 일으켜 ‘맑고 티없는 경지’ 정도로 성(聖)스럽다는 생각을 내며 스스로 확철대오하는 방편을 얻었다고 여긴다. 이런 이를 풀어놓으면 미치광이가 되고 붙들어 두면 마(魔)가 되며, 세상에 나가 무지한 인간들을 속일 것이다. 그리하여 깊은 재앙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신심을 퇴보시키며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을 막게 되는 것이다.

4. 공(空)에 빠지는 장애

   참선하는 데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기 심신과 바깥 세계를 모두 공으로 돌리고, 텅 비어 아무 매일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경지에 다다라, 자기 심신이 있는 것도 세계가 있는 것도 보이지 않고, 안팎을 구분할 수 없이 모든 것이 공이 된다 라고 하는 이가 있다. 여기서 ‘이런 경지가 바로 선(禪)’이라 여기면서 ‘이렇게 공해질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 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앉아도 길을 가도 다 공이어서 오고감이 모두 공(空)이다. 행주좌와 언제나 마치 허공 속에서 하는 듯하게 되니 이것은 생멸심이지 선은 아니다.
   집착하지 않는 경우는 완공에 빠져 캄캄무지하게 되고, 집착하면 바로 마가 되어버리는데, 자기 스스로는 확철대오하는 방편을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그 공이 참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납자라면, 의정을 일으키고 화두를 마치 하늘을 찌를 듯한 긴 칼인 양 생각하여 그 칼날에 부딪치는 사람은 목숨을 잃어버린다고 여겨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설사 공하여져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를 얻었다 해도 그것은 다만 ‘텅 비어 인식이 없는 상태’ 일 뿐 완전한 공부는 아니다.

5. 알음알이로 공안을 해석하는 장애

   어떤 이들은 참선할 때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침내 알음알이로 헤아려 옛 스님들의 공안을 어지러이 천착해댄다. 그들은 공안에 대하여 전부를 제시한 것[全提]이라느니 부분만 제시한 것[半提]이라느니 하며, 향상구(響相句)니 향하구(向下句)니 한다. 또는 이것은 주이며 저것은 객이고 어떤 것은 핵심적인 내용이며 어떤 것은 부수적인 이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알음알이로 따져 이해한 사람들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경지에 왔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비록 옛사람이 하셨던 꼭 그대로 도리를 설명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생멸심이지 선은 아니다.
   옛사람들의 한마디 말씀은 마치 솜뭉치 같아서 삼킬 수도 토할 수도 없으니, 어찌 공부하는 사람에게 많은 해석의 여지를 허락하여 알음알이를 이끌어내도록 하겠는가. 그들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의정을 일으켜 온몸으로 부딪쳐 들어갈 수 있다면 해석의 여지와 알음알이는 그대들이 없어지기 전에라도 벌써 잠잠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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