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팔만의 문에 생사가 끊겼다.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시방 어디에도 그림자가 없고 삼계에도 자취가 끊어졌으며, 오고가는 인연 속에 떨어지지도 않고, 중간에도 머물 뜻이 없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가운데 실오라기만큼이라도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마왕의 권속이 될 것이다. 이 구절의 속뜻은 납자들이 알기 어려운 경지이니, 이것이 곧 ‘이 한 구절이 하늘에 닿으니 팔 만의 문(門)에 생사 뚝 끊겼다’ 하는 소식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대목은 ‘이 한 구절이 하늘에 닿으니......’ 하는 부분이다. 시방세계 어디에도 실오라기만한 빈틈과 이지러진 곳이 없고, 터럭만한 그림자와 자취도 없으니 과연 찬란한 빛으로 살아 움직이는 경지라 하겠다. 그런 불조(佛祖)니 중생이니 할 것 없는 자리에, 생사란 또 웬말인가?

27. 분명한 경계라 해도 그것은 생사심이다.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가령 가을 물에 비친 달 그림자처럼, 고요한 밤에 들리는 종소리처럼, 치는 대로 틀림없이 들리고 물결 따라 흔들리며 흩어지지않는 경지에 들었다 하자.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이곳 생사언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참선하는 사람들이 만일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아니 설사 도달했다손 치더라도, 이는 아직 생사 쪽의 일이니 반드시 스스로 살길을 찾아내야 비로소 되었다 하리라.

28. 꼿꼿한 마음가짐으로 수행하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불로 얼음을 녹여 다시는 얼음이 되지 않고, 화살이 한 번 시위를 떠났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형편처럼, 수행자라면 이렇게 처신해야 한다. 이것이 편안한 곳에 가둬 두어도 머물려 하지않고, 누가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이유이다. 성인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일정한 처소가 없느니라.”

   나는 이렇게 평한다.
   수행자의 마음가짐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 이 말씀을 자세히 연구하여 몸에 익히기만 하면 뒷날 저절로 깨닫게 되고 물들거나 끄달릴 일은 조금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알음알이를 일으켜 그곳에 쏠리면 이른바 ‘발심부터 진실되지 못하여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다’ 는 경우가 되고 만다.

29. 함부로 세상일에 관여하지 말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이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서 함부로 세상일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물들고 하는 일마다 얽매이게 된다. 그런 사람은 도를 깨달았다 해도 바깥 경계를 만나면 금새 분주해지니,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유명무실할 뿐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가는 곳마다 물들고, 하는 일마다 매이는 이유는 참구하는 마음이 절실하지 못하여 미세한 번뇌를 끊지 못하고 죽지 않으려고 바둥대기 때문이다. 진정한 납자는 마치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을 지나가듯 물 한 방울도 묻지 않을 만큼 조심해야 비로소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

30. 억지로 망념을 다스려 공무(空無)에 떨어지는 병통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이런 식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을 단단히 검속하여 모든 현상[事]을 싸잡아 공(空)으로 귀결시키고, 눈을 딱 감고서 겨우 망념이 일어날라치면 갖은 방법으로 부숴 없애고, 미세한 생각이 일자마자 곧 억눌러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단견(斷見)에 빠진 외도[空無外道]로서 혼만 흩어지지 않았을 뿐 영락없는 죽은 사람이라, 깜깜하고 아득하여 아무런 느낌이나 인식이 없다. 이는 마치 자기 귀를 틀어막고 남도 못듣겠거니 하면서 방울 달린 말을 훔친다는 이야기와 같으니 부질없이 자기를 속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이러한 사람의 병통은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공안을 참구하지도 않으며, 온몸으로 깨달아 보겠다는 의지도 없이, 그저 알음알이로 망념만을 다스리려 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설사 이런 사람은 맑고 고요한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사실은 미세한 번뇌까지는 끊지 못하였으니 결국 참선하는 납자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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