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경론에서 증거를 드는 알음알이를 조심하라
    
   참선할 때에는 화두를 들고서 오직 이 의정이 깨어지지 않았음을 알았으면 끝까지 딴 생각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결코 경에서 증거를 대어가며 알음알이에 끄달려가서는 안된다.
   알음알이가 일단 작동하게 되면 망념이 갈래갈래 치달리게 되니, 그때 가서 말 길이 딱 끊기고 마음 쓸 곳이 없어진 경지를 얻고자 한들 되겠는가?

37. 잠시도 중단하지 말라.

   도(道)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공부는 잠시라도 중단해서는 안되니 중단해도 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진정한 납자라면 눈썹이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절실하게 공부를 해야 하니 어느 겨를에 딴 생각을 내겠는가? 옛 스님네께서도 “마치 한사람이 만명의 적병과 싸우듯 해야 하니 한눈을 팔 겨를이 있겠는가?” 라고 하셨다. 이것은 공부에 가장 요긴한 말이니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38. 깨닫지 못하고서 남을 가르치지 말라.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깨닫지 못하였으면 오직 자기 공부만 힘써야지 남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서울에 가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서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남을 속일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는 일이다.

39. 방일(放逸)과 무애(無碍)를 혼돈하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새벽이나 밤이나 감히 게을러서는 안된다. 자명(慈明:985-1039)스님 같은 분은 밤에 잠이 오면 송곳으로 자기 살을 찌르면서 “옛사람은 도를 위해서라면 밥도 안먹고 잠도 자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라고 하였다고 한다. 옛사람은 석회로 테두리를 그려놓고 깨치지 못하면 그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제멋대로 놀아제껴 법도를 따르지 않으면서 그것을 “걸림없는 공부” 라 하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40. 얻어진 경계(境界)에 집착하지 말라.

   참선 하는중에 몸과 마음이 거뜬(輕安)해 지거나 혹은 화두(話頭)를 이해했을 때 그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나 박산(博山)은 당시 “뱃사공 덕성(德誠)스님은 종적이 없어졌다(船子和尙 : 당나라 고승으로 약산 유엄스님의 법손. 수주화정에서 배 한척을 띄워놓고 사람들을 건네주면서 인연따라 설법 하였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뒤에 스스로 배를 엎고 종적을 감추었다)” 는 화두를 들고 있었는데 하루는 전등록(傳燈錄)을 읽다가 조주(趙州:778-897)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부탁한 말씀인 “삼천리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 하는 대목(조주스님에게 한 스님이 떠나겠다고 인사하니 조주스님은 이렇게 당부하셨다. ‘부처님이 계신 곳에도 머무르지 말고 부처님이 안계신 곳은 얼른 지나거라. 그렇게 해서 삼천리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이 소식을 잘못 들먹여서는 안된다.’)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메고있던 푸대를 끌러 천근 짐을 내려놓은 듯 하였다.
   그때 나는 확실하게 깨쳤다고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보방(寶方)스님을 만나게 되자 나의 깨달음이란 것이 마치 네모난 나무를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격으로 터무니 없어 비로소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한 다음에 큰 선지식을 만나지 않았다면 비록 경안(輕安)은 얻었을지 모르나 끝내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보방스님은 이 노래를 지어 주어서 나를 격려하였다.
 
공(空)으로 공을 밀쳐내니 그 공(功) 더없이 크고
유(有)로 유를 쫓아내니 덕이 더욱 오묘하다.
가섭이 두타행에 안주했다고 하는 비난은
편안함을 얻은 곳에서 편안함을 잃는다는 말이네.

   이 게송은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더 내딛게 하는 말씀으로 선을 공부하는 납자들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나는 납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보방스님에게서 유(有)와 공(空)을 긍정하지 않는 뜻을 터득하고 나서 부터는 응용[수용(受用)]이 무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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